2009.05.21 07:29
 페트라는 십자군 전쟁 시에 잠깐 유럽인들에게 알려졌다가 1812년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가 발견하기 전까지 700년이란 긴 잠을 자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잊혀진 도시를 『시리아와 성지 순례, Travels in Syria and the Holy land)』라는 책에 적었는데 이 책은 젊은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로버츠(David Roberts, 1796~1864)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 데이비드 로버츠 
로버츠는 어느 면으로 보면 현대판 입지전 즉 신화와 같은 인물이다. 영국 에딘버그(Edinburgh) 주변에서 태어난 로버츠는 어릴 때부터 그림에 천재적인 소질을 갖고 있었지만 집이 가난하여 학교에 갈 수는 없었다. 실제로 그가 경력을 위해 학교 졸업장이라는 자격증을 얻은 것은 40살이 되어서였다.

학교에는 입학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지만 그의 그림 그리는 재주는 단연 돋보여 7년 동안 <에딘버그트러스트아카데미>에서 보수 없이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당대에 소위 문맹자가 아카데미란 이름을 건 기관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은 파격적인 일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 후 그의 인생은 그야말로 동화와 같다. 20살 때인 1815년에 인테리어 장식가로서 첫 직장을 잡고 곧바로 에딘버그에 있는 ‘판테온’ 극장의 미술가로 발탁되더니 1819년 즉 24살에 에딘버그 왕립극장의 화가로 임명되었다.

당대의 틀에 잡힌 사회구조로 볼 때 학력이 전무하고 배경이 전혀 없는 그가 왕립극장의 정식 화가로 대접받았다는 것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림에 대한 실력이 누구보다 탁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로버츠에 대한 전문가들의 인지도인데 그의 학력과 배경이 미천함에도 불구하고 1831년 <영국화가협회>의 회장으로 당선되었고 1838년에는 영국의 왕립아카데미 회원이 될 정도였다.

그는 공적으로 승승장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화가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유럽의 수많은 국가를 여행하면서 건물, 전경, 기념물 등을 스케치, 드로잉은 물론 그의 특기라 볼 수 있는 수채화에 담았으며 동판에 자신의 그림을 에칭하기도 했다.

페트라 그림으로 세계적인 화가로 성장

그에게는 어릴 때부터 꿈꾸던 목표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동경하던 이집트, 팔레스타인, 시리아로의 여행이다. 당대에 외국으로의 여행이란 일부 특권층이나 할 수 있는 것이었므로 그는 자신의 꿈을 위해 평소에도 자산을 모으는 데 열중했다.

1838년 8월 예상한 만큼의 자금이 모이자 그는 자신이 원하는 원정대에 합류한다.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그가 여행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모든 여행 자금을 대었으므로 그의 원정대라고도 부를 수 있다.

▲ 궁정의 무덤, 데이비드 로버츠의 그림으로 페트라를 통해 유명작가가 되었고 그를 통해 페트라가 세계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파리를 떠나 말타와 사이클레이드를 방문한 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다. 사실 모든 자금을 여행에 투입하였고, 여행을 끝낸 후 발간할 책이야말로 유일한 수입원이었므로 그는 잠시도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다. 그는 피라미드 등을 보고 나일강을 따라 아부심벨을 방문했다.

그는 방문지마다 철저하게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드로잉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가 고난스러운 여행을 마다하지 않고 그림 그리는 데 열중했던 그의 명성이 이미 당대에 상당히 알려져 있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카이로에 묵었을 때 그는 모스크 즉 회교 사원의 내부를 그릴 수 있도록 허락받은 최초의 유럽인이었다.

여행을 계속하던 그는 어렸을 때 큰 충격을 주었던 페트라를 잊을 수 없었다. 드디어 1939년 그는 그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는 여행길에 들어섰다. 그는 시나이 반도는 물론 사해, 베들레헴, 레바논을 거쳐 그가 고대하던 요르단의 페트라를 방문했다.
 
이때 그린 페트라의 그림이야말로 그의 역작 중의 역작이다. 그는 페트라를 거쳐 팔미라를 방문하려 했으나 불행하게도 열병에 걸려 팔미라를 방문하지 못하고 영국으로 철수했다.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여행하는 동안 작성한 각종 자료들을 발간했다. 그가 갖고 온 자료를 본 출판사가 그에게 제시한 선인세가 무려 3천 파운드나 되었다는 것은 당대의 전설이 될 정도로 엄청난 평가를 받았음을 알려준다.

당대의 전설이 된 선인세

결론적으로 그는 자신이 직접 그린 수채화 그림을 6권으로 발간했는데 이것이 그를 영국 사상 가장 유명한 풍경화가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었고 재정적으로도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는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으로 전시회를 열어 판매하기도 했는데 그의 고객 중에는 유명 작가인 찰스 디킨스(Char;es Dickens), 윌리엄 새커리(William Thackeray), 윌리엄 터너(William Turner) 등의 저명인사가 있었고 그들은 로버트와 평생 친구가 되었다. 그 후 그는 계속하여 세계 각지로의 여행을 계속하였는데, 그림을 완성하자마자 현장에서 곧바로 판매되는 신화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도 세월은 막을 수 없는 법, 1864년 64세로 눈을 감았고 노르우드(Norwood)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드로잉, 스케치, 수채화이지만 유화도 적지 않은데 대부분은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유명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사실상 페트라가 과거의 영광을 되찾은 것은 로버츠의 영향이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을 정도로 그의 페트라 그림은 압권이다.

페트라는 그 중심부에서부터 물이 말라버린 강(와디)들과 고대 대상로들을 따라 사방으로 수 킬로미터까지 뻗어 있는데 얼마 전에도 동굴에 거주하는 베둘족(베두인족 가운데 페트라에 사는 이들을 뜻함)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나바테아인들이 만든 물 저장 장치에 고인 물을 마시고 염소를 돌보며 지냈다.

페트라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자 요르단 정부는 인근 지역에 콘크리트 블록 집을 건설한 후 이들의 이주를 종용했다. 학교와 진료소를 건설해주자 결국 1천여 명에 달하는 이들이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들이 승낙한 이유는 극히 현실적인 그들의 요구조건을 요르단 정부가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옮기는 새로운 거주지에서 염소를 방목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콘크리트 블록 집보다는 자신들이 과거부터 살아오던 습속을 바꿀 수 없다는 설명이다. 물론 정부에서는 페트라 발굴단의 연구원으로 특채될 수 있도록 우대하고 막일할 때에도 우선권을 보장하며 행상도 반대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부가했다.

▲ 페트라의 베두인, 베두인들은 아직도 고대 유목민의 생활을 주장한다. 

페트라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사전에 정보 없이 다니다가는 길을 잃기 쉽다고 한다. 누군가가 실종되면 정부는 이 지역을 지키는 군인들에게 의뢰하는 것이 아니라 베둘족에게 수색을 의뢰한다.

그들은 페트라 지역을 잘 알고 있으므로 길을 잃어 탈수 증세라도 보이는 사람들을 발견하면 나름대로 치료한 후 낙타나 소형 트럭에 태워 데려온다고 한다. 안내인이 없이 페트라의 구석구석을 살펴보려면 반드시 낙오될 때 필요한 물을 챙기라고 조언하는 이유이다.

부르크하르트에 의해 재발견된 이후 페트라는 계속 발굴되었는데 1896년 <예루살렘성서고고학연구소>에서 최초의 보고서를 출간했다. 그 후 1897-1898년에 걸쳐 독일의 부른노우와 도마츠브스키에 의해 무덤과 건물들이 발굴되었으며, 계속하여 로마시대의 도시가 발굴되기도 하였다.

1929년 콘웨이와 호스필드에 의해 페트라의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졌고, 그 후 1982년에 이르기까지 로마 극장과 여러 유적들이 추가로 발굴되었지만 학자들은 도시 중심부의 75퍼센트 이상이 아직도 드러나지 않았다고 추정한다. 현재 미확인된 지역에 대한 발굴이 진행되고 있으므로 이 유적들의 모습이 나타나면 지금까지 알려진 페트라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줄 것으로 생각한다.

베두인의 고향

페트라가 있는 요르단은 전형적인 농업국이지만 사람이 살기에 부적합한 척박한 땅이 거의 75퍼센트나 된다. 국토의 면적은 남한보다 약 10퍼센트 정도 작은 8만9천 제곱킬로미터이고 인구는 2008년 기준 약 620만 명이다.

요르단은 크게 요르단 강, 팔레스타인 구릉 지대, 트란스 요르단 고원, 사막 평원으로 나누는데 팔레스타인 구릉 지대는 1967년 중동 전쟁 때 이스라엘에게 많은 지역을 빼앗긴 데다 팔레스타인의 활동 무대이므로 이스라엘과 항상 긴장 상태에 있다.

현재 요르단을 구성하는 인종은 팔레스타인과 베두인인 아랍인이 절대 다수이다. 이 중 베두인은 황량한 대지에 천막을 치고 이리저리 흩어져 유목 생활을 하면서 무력 사용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 것으로도 유명하다.

베두인은 낙타ㆍ양ㆍ염소 같은 가축을 키우며 먹이인 풀을 찾으면서 여러 지역을 돌아다닌다. 이들은 주로 물이 있는 오아시스나 말라 버린 강 주변에 천막을 치고 산다. 항상 이동해야 하므로 간이로 지은 집에 사는 것이 보통이지만 최근에는 정착하는 베두인 족들도 많아지고 있다.

베두인의 생활 중에서 흥미로운 것은 낙타나 염소의 털로 짠 천으로 만든 천막이다. 기둥과 지붕을 ‘단부’라 불리는 밧줄로 연결하는데 사막에서 길을 잃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이 단부를 잡는다. 그러면 집주인이 물이나 음식을 주면서 여러 가지 정보를 알려준다고 한다.

▲ 모세의 죽음, 학자들은 성서에 기술된 이집트 탈출 및 가나안 정복 등이 대체로 역사적 사실에 부합되므로 모세가 실존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베두인의 의상은 매우 독특하다. 현대화된 문명의 영향으로 최근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전통적인 복장을 고수하면서 살아간다. 남자들은 주로 목 부위에 단추가 달린 흰색으로 만든 기다란 ‘소브’라고 불리는 헐렁한 가운을 입고 다닌다. 그리고 모자를 쓰고 그 위에 널찍한 장방형의 무명천인 ‘구트라’를 쓴다.

여자들은 흰색 블라우스에 발끝까지 내려오는 다채로운 색깔의 드레스를 주로 입는다. 머리에는 검은 수건을 두르고 눈 주변에는 검은 화장을 한다. 거리를 다닐 때는 항상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데 이는 코란에 ‘여성은 음부나 가슴은 덮어 가리고 어버이, 형제, 남편, 아들, 노예 이외의 남성에게는 신체를 보여서는 안 된다’라는 가르침을 따르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베두인 여성들은 앞이마를 장식한 보석을 비롯하여 코걸이, 손가락과 발가락 반지, 코란 글귀가 새겨진 목걸이 등 보통 2~4개씩은 하고 다닌다.

요르단의 특징은 중동 국가이면서도 석유가 생산되지 않는 자원 빈국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근래 석유가 없는 대신 ‘죽음의 바다’로 알려진 사해(死海)에서 유용한 광물 자원이 대량으로 생산되어 화학 및 비료 산업이 발달했다. 이 부분은 뒤에서 다시 설명한다.

모세의 활동 무대

요르단은 성경의 주 무대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은 남쪽에서 지중해 연안까지의 여러 대상로를 장악했는데 그 중에는 모세와 관련되는 장소가 많이 있다.

모세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아니더라도 관심을 보이는 것은 그의 생애가 극적인 것은 물론 서양으로 구분되는 세계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모세는 『구약성서』의 다섯 책인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모두 모세와 관련되어 있는데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출애굽기》, 《민수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특히 최근의 고고학적 ·금석문학적(金石文學的) 연구 결과, 성서에 기술된 이집트 탈출 및 가나안 정복 등은 대체로 역사적 사실에 부합된다고 인정되어 모세가 실존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일반적으로 모세는 이집트가 자랑하는 제국시대인 제19왕조의 람세스 2세(재위 BC 1290∼BC 1223)로부터 박해를 받았으며 이스라엘인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일으키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시나이산(山)에서 신으로부터 십계명(十誡命)을 받는다.

▲ 여리고의 원경, 여리고의 유적지(산 정상 중앙)는 기원전 9000년경으로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도시로 추정한다. 

모세가 람세스 2세 시대의 사람이라면(이보다 약 100여 년 앞선 투모세스 3세 시대로 추정하기도 함) 모세의 이야기는 기원전 13세기에서 기원전 15세기로 추정하며 성경에 나타나는 여리고는 이 당시로 볼 수 있다.

그 후 모세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에돔·모압의 광야에서 40년에 걸친 유랑생활을 계속하다가 결국 자신은 가나안에 도달하지는 못하고 요단강을 건너기 전 여리고(Jericho) 맞은 편에 있는 모압 땅의 느보산(山)에서 120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의 유지는 이어져 후계자인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인을 이끌고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강력한 국가들과 전쟁을 치루는데 그 중 첫 번째 도시가 여리고이다. 성경에는 이스라엘인들이 나팔을 불고 함성을 지르자 여리고의 성벽이 무너졌다고 한다.

여리고는 현존하는 세계 도시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그 연대가 모세 시대가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는 신석기 심지어는 구석기 시대로 인식하는 기원전 9000년~기원전 7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엄밀한 의미에서 여리고는 현재 요르단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점령한 분쟁지역인 웨스트 뱅크(West Bank)에 있는 도시이다. 그러나 과거 성경의 무대를 현 국가 개념으로 단정하여 구분할 수 없으므로 이 장에서 설명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방어용 구조물

약 1만 5천년 전을 전후해 지구상의 기후가 온난해지면서 빙하가 녹기 시작하고 황량했던 지역에 초목이 자라고 야생 생물들이 살기 시작하면서 인간들은 새로운 생활방식들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수렵과 채집에서 농업으로 생활방식의 기반이 바뀐 것이다.

농업은 수렵에 비해 노동집약적이지만 일정한 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수단으로 적격이다. 인구가 증가하자 사람들은 촌락과 작은 도시들을 세우고 성을 쌓아 외부의 침입을 막고자 했다. 농업 생활로 식량의 저축이 가능해지자 이를 빼앗으려는 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한 것이다.

이러한 농업생활인들이 만든 방어용 구조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곳이 바로 여리고이다. 여리고인들은 기원전 9000년~기원전 7000년경 돌과 진흙벽돌로 성과 탑들을 건설했다. 그들은 또한 흙을 반죽하여 죽은 사람의 유골에 바른 후 자주색 조개껍데기로 눈을 만들어 붙였으며 머리카락과 수염은 적갈색으로 색칠을 했다.

여리고의 인구는 2천명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는 신석기시대 한 마을의 인구를 100~150명 정도로 추정할 때 거의 20배 이상의 인구가 한 지역에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연히 이들 공동사회를 통치할 수 있는 지배자가 등장하는데 이는 고대 전제사회로 들어가는 기본 여건이 조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계속)

참고문헌 :
 『세상을 바꾼 건축』, 클라우스 라이홀트 외, 예담, 2006
「요르단 사막 속에 꽃피운 중세 유적을 간직한 나라」, 허요한, 뉴턴, 1997년 11월
「여리고(Jericho)성의 상징적 특성에 관한 연구」, 남호현, 건축역사연구 제11권 4호 통권32호, 2002년 12월
『세계사의 100대 사건』, 리더스다이제스트, 1995
이종호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초빙과학자 | mystery123@korea.com

저작권자 2009.04.08 ⓒ ScienceTimes
Posted by @topcpla PeachPri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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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heap oakley sunglasses 2013.07.19 03: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신 매력있어, 자기가 얼마나 매력있는지 모르는게 당신매력이야

2009.05.14 00:35

▲ 페트라의 시크, 페트라로 진입하는 유일한 통로로 약 1킬로미터나 미로처럼 이어진다. 
과학으로 보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사해와 아카바 만 중간에 위치한 페트라는 구석기시대부터 신석기시대 이후까지의 유적이 발굴될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이 가운데 특히 구약성서에서 에돔의 셀라(Sela)로 언급되는 시기를 학자들은 기원전 1400~1200년으로 추정한다.

이 지역은 또한 '바위에 거하는 자들'이라는 뜻을 지닌 '호리 족속'의 거주지였는데, <사사기> 1장에서는 "아모리 사람이 살던 지역은 아그랍빔 비탈부터 셀라를 거쳐 그 위쪽이었다"라고 적혀 있는 등 '아그랍빔 비탈의 바위'로 언급된다.

'바위'라 불리는 이 도시의 이름은 시실리의 디오도루스에 의해 최초로 언급되는데, 그는 나바테아인들이 기원전 312년 안티고누스 1세의 공격을 받고 그들의 생명과 음식과 가재들을 이 도시에 숨겨놓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곳을 구약의 셀라와 같은 장소로 본 사람은 교회사가 유세비우스였으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스라엘이 미디안의 다섯 왕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던 역사에서 이때 처형당한 미디안의 왕 레켐을 페트라의 왕으로 보았다.

페트라를 만든 수로

아라비아에서 이주해 온 유목 민족인 나바테아인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6세기의 일로 이들은 기원전 580년경 에돔족과 혼합되었으며 페트라는 기원전 400년경부터 종교적 중심지이자 수도로 자리 잡는다.

페트라가 동시대에 특별하게 중요시되었던 것은 유럽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을 연결하는 지역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수천 년에 걸쳐 계절적 급류인 와디 무사(Wadi Musa)에 의해 형성된 좁은 협곡을 의미하는 시크(Siq)는 도시로 진입하는 유일한 통로로 밖에서는 그 입구마저 잘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입구부터 높이 100미터에 이르는 구불구불한 사암 절벽이 1킬로미터나 미로처럼 이어져 있다. 그러면서도 식수가 많이 나와 도시를 지킬 만한 사람들이 살기에 충분했다.

대상들이 페트라를 통해 이집트의 기자, 지중해, 시리아는 물론 동쪽으로 여행할 수 있으므로 페트라는 통행요금 징수와 아스팔트의 무역을 통한 수입이 많아 도시 사람들은 아주 부유해졌으며 그들이 관장하는 지역은 현재의 시나이 반도에서 아라비아 반도 절반 정도에 달하는 50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했다.

▲ 페트라의 조각상과 수로, 페트라에서 가장 유명한 시크 안의 대상들을 조각한 것으로 하단 후면에 수로가 있다. 

페트라 자체는 작은 협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상주 인구의 규모에 한도가 있었으나 전성기 때에는 페트라와 연계되는 주변 지역에 무려 50여 만 명이 거주할 수 있었다. 페트라가 번성하게 된 열쇠는 나바테아인들이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페트라는 원래 연간 강우량이 고작 105밀리미터에 불과하지만 그들은 빗물을 마치 귀중한 곡물처럼 각지에서 거둬들여 저장할 수 있도록 테라코타로 만든 정교한 저수시설을 설치했다 일부 장소는 조각품처럼 잘 깎아 만들어 방문자들을 감탄하게 만드는데 시크의 중앙 부분에 있는 수로 옆의 대상(隊商)들의 조각은 페트라 최고의 걸작품으로 꼽힌다.

그들은 바위에 물이 고이도록 수백 군데를 오목하게 깎아 놓아 가뭄을 이겨낼 수 있었고 도시를 에워싸고 있는 산들에 석조 댐을 건설해 폭우 뒤에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는 물의 범람을 방지할 수 있었다.

요르단박물관의 아마르 박사는 페트라 안에만 200여 개의 저수시설이 있는데 이곳의 저장량은 약 4천160만 리터에 달하여 10만 명이 1년 동안 사용해도 충분한 양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식수만으로는 인근에 상주하는 50여 만 명의 식수를 공급할 수 없는데 그들도 주변에서 거대한 식수원을 사용했다.

가장 부유한 도시로 번창

낙타를 몰며 대상들에게 길을 안내하던 나바테아인들은 전설적인 유향로(乳香路)의 북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상들에게 사막에서 생존할 수 있는 비법을 전수해주었다.
 
그 비법은 다소 엉뚱하게 들리겠지만 페트라에만 도착하면 사막의 모래바람을 피할 수 있고 물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는데 사막을 건너다녀야 하는 대상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정보였다. 물론 그들의 제안은 공짜가 아니었다. 그들은 대상들로부터 통행료를 받았는데 이것이 페트라가 동시대에 가장 부유한 도시로 번창한 이유이다.

▲ 파라오의 보물, 헬레니즘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의 건축 전통을 따르고 있으며 파라오의 보물이 있다고 알려졌지만 나바티아 왕 하리스 4세의 무덤이었음이 밝혀졌다. 
해발 950m의 은닉처인 페트라는 높고 가파른 암벽들이 좁아지면서 도시 외곽에 어두운 골짜기를 형성하여 접근이 어렵고 적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하여 로마도 무력으로는 페트라를 정복할 수 없었다.

그러나 로마는 전투에 관한 한 고수 중의 고수였다. 2세기 초, 로마군은 여러 차례의 공격에도 함락되지 않자 페트라로 흘러드는 물줄기를 끊었다. 혹독한 식수난을 겪게 되자 결국 나바테아인들이 로마에 항복했다는 것이다.

페트라는 기원후 106년 트라야누스 황제 때 로마의 확장 정책의 일환으로 로마에 합병되었는데 학자들은 로마인들이 페트라를 정복한 것이 아니라 정략적인 면에서 페트라가 합병하는 데 동의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실제로 페트라를 방문하면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수로를 볼 수 있는데 이들 수로는 천혜의 빗물을 모두 받아 저장하기 위한 작품으로 페트라가 식수 때문에 로마에 항복했다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여하튼 로마에 정복된 페트라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방문한 이후 ‘하드리아누스의 페트라’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여하튼 페트라는 로마에 합병된 이후에도 페트라를 번영케 했던 무역로의 기능은 계속되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페트라의 통치세력이 나바테아인들로부터 로마인으로 교체된 것뿐이었다.

골짜기가 워낙 좁아 페트라에는 대규모의 독립적인 건물을 건설할 수 없었다. 그래서 주민들은 그들의 신과 망자들과 함께 바위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페트라의 암석은 파내거나 조각하기 수월한 사암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페트라에서는 바위를 깎아 무덤과 주거지를 만들었는데 현재 800개의 주거지와 무덤이 발견되었다. 도시 길이는 8킬로미터에 달하며 시가지 입구는 동쪽의 시크, 남쪽의 투그라, 북쪽의 투르크 마니에라라는 3개의 협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페트라는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 2세기 사이에 전성기를 누렸는데 당시 페트라의 인구는 3만 명을 넘었다. 페트라에는 포장도로, 목욕탕, 상점. 극장(2개), 장터(3곳), 궁전, 체육관, 계단식 정원 등이 있었다.

파라오의 보물과 로마 유적

현대인들을 감탄케 하는 유적은 장밋빛 사암을 새겨 만든 신전과 무덤의 정면부인 카즈네피라움(Khazneh Fir'awn, 파라오의 보물)으로 시크를 통과하자마자 나타난다. 이 건물 앞에는 넓은 광장이 펼쳐져 있는데 페트라인들은 붉은 사암에 높이 40미터, 너비 28미터의 정면부를 예술적으로 아주 화려하게 새겨 놓았다.

▲ 로마인의 극장 유적, 바위산을 반쯤 깎아 움푹하게 만든 건축물로 너비 40미터, 33개 계단에 약 6000명의 인원을 수용할 만큼 그 규모가 크다. 

정면부는 2개의 박공벽, 프리즈, 기둥, 조각상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면부 중앙에 대좌가 있고 그 위에 항아리가 있는데 베두인들은 그 안에 파라오의 보물이 있다고 생각했다.

정면부는 예술적으로 아주 화려하게 새겨 놓았지만 내부는 너무나 소박하고 간소하다. 이 건물은 헬레니즘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의 건축 전통을 따르고 있는데 이것은 17세기에 중세유럽에서 유행했던 바로크 양식과 유사하다.

건축 방법은 정면에서 굴을 파고 들어간 것이 아니라 천장에서 구멍을 뚫고 수직으로 깎아내렸는데 그 공간이 무려 1천700세제곱미터나 된다. 그러므로 이 건물은 건축된 것이 아니라 조각된 것이다.

원래 건물 자체가 파라오의 보물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으므로 페트라 안의 기둥에 있는 커다란 화병 조각 속에 보물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보물들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 건물은 근래의 발굴 조사에 의해 나바티아 왕 하리스 4세의 무덤이었음이 밝혀졌다.

카즈네피라움에서 협곡을 따라가면 열주대로의 서쪽 끝에 있는 신전 카스르알빈트피라움(Qasr al Binr Fir'awn, 파라오 딸의 성(城)이라는 뜻)이 있다. 바위를 깎지 않고 만든 유일한 건물로 이 도시의 주신(主神)인 두샤라를 모셨던 곳이다.

본전은 높이 23미터로 열주랑·전실(前室)·지성소로 이루어져 있고 신전 앞뜰에는 야외 제단이 설치되어 있다. 두샤라 신은 처음에는 돌기둥 모양을 했다가 나중에는 인물 모양의 숭배상으로 기려졌다.

신전의 이름으로 미루어 이 지역이 오래 전부터 문화적으로 이집트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지만 이와 같은 변화는 나바테아의 통치자가 족장의 신분에서 왕이라는 전제군주로 바뀐 정치적 변화 때문이다. 두샤라는 그리스의 디오니소스와 동일시되었으며 흉벽 무덤이나 계단 무덤의 자리에 그리스 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은 왕들의 무덤이나 무덤 신전들이 도입되었다.

학자들은 이들 무덤 건물들이 회로 칠해진 후 그 위에 그림들이 그려졌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바람과 모래 등 자연 침해에 의해 회벽이 사라지고 바위만 남아 당초의 설계자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환경으로 변모되었다는 설명이다.

▲ 아시리아 건축 예술로 건설된 유골함이 있는 무덤 전경. 

카스르알빈트피라 우측에는 2세기 초에 나바테아인들이 건설한 것을 이곳을 지배한 로마인들이 확충한 너비 40미터, 33개 계단으로 된 극장 유적이 남아 있다. 바위산을 반쯤 깎아 움푹하게 만든 건축물로 강렬한 인상을 주는데 약 6천명의 인원을 수용할 만큼 그 규모가 크다.

학자들은 이 극장을 각종 예술 행사나 오락적 행사를 위한 기능보다는 하나의 제의적 기능을 갖춘 장소로 인식하며 왕의 장례식은 물론 각종 회의 및 종교 의식을 치룬 것으로 추정한다. 극장 왼쪽에는 로마시대의 시가지가 있는데, 이곳에는 열주대로가 뻗어 있고 왕궁·신전·공공욕장 등의 유적이 있다.

사막의 경계 지역에 건설된 도시

도시의 서쪽 끝에 바위를 깎아 만든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장례사원인 앗데이르(ad-Dayr, 수도원) 유적이 있다. 카즈네피라움과 마찬가지로 암벽을 깎아서 만든 2층 건축물로 높이 50미터 길이 45미터이다. 1세기 말 오보다스(Obodas) 왕에게 바쳐진 신전 또는 무덤으로 추정하며 4세기부터 비잔틴 교회로 사용되었다.

이 계단 길은 좌우에 무덤과 제물을 봉헌하는 벽감들이 줄을 이어 있으므로 일종의 ‘성스러운 길’로 통한다. 그러나 ‘유골함이 있는 무덤(Tomb of the Um)'을 비롯해 페트라의 많은 무덤이나 장례 후 연회가 펼쳐졌던 석조 트리클리니움(triclinium, 의자가 3면에 달린 식탁이 있는 식당)의 계단 장식은 아시리아 건축 예술이다. 산의 정상에서는 이스라엘 지역까지 보이며 사해(四海)도 보인다.

영국의 고고학자 레오너드 울리(Leonard Wooley) 경은 이를 보고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바테아의 건축가들은 고전적인 건축물을 세밀히 분해하여 여러 조각을 낸 다음 처음 설계도의 기능과는 전혀 상관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결합시켰다."

영국의 레이야드 경(A. H. Layard)은 1887년 이곳을 방문하고 보다 감탄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물 등 사람의 생존에 필요한 것이 없는 사막의 경계 지역에서 바위에 극장, 신전, 공공기관, 무덤, 개인용 건물 등을 끈질긴 노동으로 건설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다.”

▲ 페트라의 키스 바위 
106년 로마에 정복 당한 후 페트라도 기독교를 받아들여 주교의 근거지가 된 동시에 한동안 계속하여 번창했지만 쇠락의 길을 피하지는 못했다. 로마가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리된 후 이 지역을 통치한 것은 동로마였는데 동로마는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페트라보다는 팔미라를 무역의 중심지로 변경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트라 지역은 계속 유목민들의 휴식처로 사용되었는데 363년과 551년에 강력한 지진이 이곳 지역에서 일어나 거주환경이 나빠지자 주민들이 페트라를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이러한 사실은 1993년에 발견된 6세기경의 파피루스 뭉치 150여 개에서도 증빙된다. 이 파피루스에는 데오도쿠스 가문의 7대에 걸친 기록이 들어 있는데 582년까지의 혼례 기록이 남아 있다.

학자들은 이들이 갑자기 페트라를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이주한 이유는 지진 등으로 거대한 저수시설이 파괴된 것을 보수하지 않아 모래에 파묻히자 더 이상 살 수 있는 거주 여건이 되지 못했다고 판단한다. 즉 그동안 페트라를 지탱하던 물이 말라버리자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설명이다.

여하튼 이 파피루스 속에는 6세기경 페트라 상류층들의 일상생활이 자세히 적혀 있으므로 파피루스의 내용이 해득되면 페트라의 많은 부분이 알려질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 이 파피루스는 요르단 수도 암만의 <아코르동양연구소>에 보관되어 있다. (계속)

참고문헌 :
  http://jesusloveus.org
『유네스코 세계고대문명』, 생각의나무, 2006
「페트라, 바위를 깎아 만든 고대 도시」, 돈 벨트, 내셔널지오그래픽, 1001년 10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베텔스만, 2003
「2000년된 고도 페트라 유적지」, 나비뉴스, 2007.5.17
『지중해』, 김성호 외, (주)에오스여행사출판부, 2007

이종호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초빙과학자 | mystery123@korea.com

저작권자 2009.04.06 ⓒ ScienceTimes
Posted by @topcpla PeachPri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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