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6.08 13:31

그동안의 복닥거리던 삶을 정리하고자 떠나는 여행, 온전히 쉬는 여행이 있는가하면 만들고, 느껴보고 체험하는 여행이 있다. 몸은 다소 피곤하더라도 후자의 경우에는 여행지에서 보다 강렬한 인상을 받게 된다. 한국관광공사는 ‘체험마을을 찾아서’라는 테마 아래 6월의 가볼만한 곳으로 경기 안성, 전남 강진, 경북 예천, 강원 양양, 인천 강화 등 다섯 곳을 선정했다.





 

눈처럼 하얀 풍산개와 뛰놀고

경기 안성 풍산개마을

안성시는 경기도의 가장 남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높고 낮은 산들이 많다. 더불어 안성은 풍요로운 먹을거리와 볼거리로 가득하다. 체험을 즐기며 볼거리도 두루 구경할 수 있는 여행지로 인기가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풍산개는 전국적으로 수천마리가 있지만 한 마을에서 이렇게 많이 키우는 경우는 없다. 현재 이 마을은 풍산개 산책, 개썰매 타기, 강아지 분양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고, 덕산리 일대에서는 배 과수원, 한우목장, 약초농장, 느타리버섯 따기, 민물고기 잡기, 손두부와 인절미 만들기 등 넉넉한 시골 체험과 먹을거리 체험을 즐길 수 있다.
또한 200m 가량의 메타세콰이어길이 조성되어 있어 자연 경관이 수려하고, 마을 한 가운데에 체험관이 있어 숙박예약도 가능하다.

오리갈비, 황토구이치킨 등의 체험도 할 수 있다. 산 좋고 물 좋은 이곳에서 방목한 흑염소 불고기와 오리갈비는 미식가의 입맛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인근에 위치한 안성허브마을, 한택식물원과 덕산저수지 등을 드라이브를 하며 여행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 문의

안성마춤 풍산개마을 031-672-4348

안성시청 문화체육관광과 031-678-2492

○ 주변 볼거리

칠장사, 덕산호수, 안성허브마을, 기솔리 쌍미륵사, 죽산리 5층석탑, 죽산리 미륵불상, 남사당전수관, 안성맞춤박물관, 바우덕이묘, 죽주산성, 서일농원

○ 교통

[서울-안성]서울-경부고속도로-안성IC-안성시 우회도로-38번 국도 - 삼죽면 - 풍산개마을(1시간 소요)

[대전-안성]서울-중부고속도로-일죽IC-38번 국도 - 삼죽면 - 풍산개마을(1시간 소요)

[부산-안성]부산-경부고속도로-중부고속도로-일죽IC-38번 국도 - 삼죽면 - 풍산개마을(4시간 소요)

[광주-통영]광주-호남고속도로-중부고속도로-일죽IC-38번 국도 - 삼죽면 - 풍산개마을(3시간 소요)





 

흙으로 문화를 빚다

전남 강진 칠량옹기마을

칠량면 봉황리는 몇 십 년 전만해도 집집마다 옹기를 구워내고, 전국으로 옹기를 실어 나를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던 칠량옹기의 고장이다. 칠량옹기가 유명했던 것은 그 근방에 차지고 철분이 많은 흙이 다량으로 나고, 옹기를 실어 나르던 편리한 뱃길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을전체가 옹기를 구울 정도로 번성했지만, 1970년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지금은 명맥을 겨우 이어가는 한적한 어촌마을로 남았다. 봉황마을에서 유일하게 옹기를 빚고 있는 칠량봉황옹기에서는 대대로 이어온 옹기의 숨결을 그대로 엿볼 수 있고, 직접 체험도 해 볼 수 있다. 고려청자의 발상지인 대구면에는 고려청자도요지가 있다. 청자를 직접 빚어보거나 작업하는 과정을 볼 수 있는 장소이다. 해안 따라 이어지는 23번 국도는 드라이브나 갯벌 따라 걷기에 제격인 길이다.

마량항에는 이국적인 풍경의 수변공원과 항구가 한 눈에 바라다 보이는 전망대가 있다.

○ 문의

강진군청 관광개발팀 061-430-3174

칠량옹기 061-433-4943

○ 주변 볼거리

다산초당, 백련사, 전라병영성지, 하멜기념관, 한골목, 영랑생가, 사의재, 강진청자박물관, 하저어촌체험마을, 고바우상록공원, 마량항, 만호성

○ 교통

[서울-강진] 서서울 요금소 진입-서해안고속도로 이용 목포IC-영암,강진방면 2번국도 진입-칠량면 목리 교차로에서 마량방면 23번 국도-칠량면 소재지방면에서 좌회전 후 봉황리방면으로 진입-칠량옹기마을






 

전통의 멋이 살아 숨 쉬는 고장

경북 예천 금당실 마을

‘물에 떠있는 연꽃’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 금당실. 조선시대 예언서인 정감록에서 십승지지 중 한 곳으로 꼽는 금당실 마을은 조선의 도읍 후보지로 거론됐을 만큼 명당으로 알려진 곳. ‘금당 맛질 반서울’이란 말도 이런 연유로 생겨난 말이다. 금당실 마을의 가장 큰 자랑은 세월을 비껴간 고택과 돌담들이다. 금당실 마을에는 반송재 고택(문화재자료 제262호)과 사괴당 고택(문화재자료 제337호)을 포함해 10여 채의 고택이 남아있고 이들 고택과 역사를 함께한 정겨운 모습의 돌담도 거미줄처럼 얽히고설켜있다.

볏짚과 황토를 이용해 차곡차곡 쌓아올린 돌담은 구불구불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마을 깊숙이 이어진다. 네모반듯하게 올라간, 깔끔하지만 삭막한 도시의 그것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다. 그렇게 이어진 돌담을 따라 마을산책을 하다보면 마치 조선시대 선비라도 된 듯 발걸음까지 느긋해 진다.

○ 문의

예천문화관광과 054-650-6395

금당실 정보화 마을 054-654-2222

○ 주변 볼거리

예천진호국제양궁장, 석송령, 회룡포, 예천온천, 학가산 우래 자연휴양림

○ 교통

[서울-예천] 서울→경부고속도로→신갈 분기점→영동고속도로→만종 분기점→중앙고속도로→예천 나들목→928번 지방도 예천방면→예천읍→용문면→금당실 마을






 

‘해’를 담고 ‘추억’을 담고

강원도 양양 해담마을

해를 담은 마을 ‘해담마을’은 추억으로 남길 수 있는 체험거리가 유난히 많은 고장이다. 험한 길도 물 위도 거침없이 달리는 수륙양용차뿐 아니라 ATV, 활쏘기, 뗏목타기, 돌화분 만들기 등 특별한 경험의 기회가 많다. 오랜만에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 가족들끼리도 서로의 취향을 맞춰가며 무엇을 하고 시간을 보낼까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다. 수려한 경관과 넉넉한 숙박시설은 두말할 것도 없고, 미천골 자연휴양림, 갈천약수터, 구룡령 옛길 등 주변 볼거리도 빼곡하기 때문이다.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양양에는 낙산사, 하조대 등 오래 전부터 유명한 관광지도 많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체험거리 가득한 농촌마을에서의 하룻밤과 함께 오색허브농원, 오산리 선사유적박물관 등 아이들의 눈과 귀를 번쩍 띄워줄 살아있는 체험현장을 구석구석 찾아보는 것을 추천한다.

○ 문의

양양군 종합관광안내소 033-670-2397~8

해담마을 정보센터 033-673-2233

○ 주변 볼거리

오색주전골, 양수발전소, 법수치계곡, 어성전계곡, 낙산사, 곤충생태관, 영동내수면연구소(연어생태학교), 하조대, 휴휴암, 남애항 등

○ 교통

[서울-양양] 1. 판교IC-호법IC-만종IC-강릉IC-현남IC-양양

<해담마을> 양양읍내-44번국도-56번국도

2. 서울-홍천-한계령-양양

[대전-양양] 회덕IC-남이IC-호법IC-만종IC-강릉IC-현남IC-양양





 

용두레 노랫가락이 흥겨운 곳

강화 용두레마을

인천광역시 강화군 내가면 황청리는 들이 넓어 농사일이 많은 마을이다. 하지만 물이 귀해 농사짓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 어려움을 이기기 위해 만든 것이 용두레. 아랫논에서 윗논으로 물을 퍼 올리는 재래식 양수시설이다. 농사의 고단함을 달래준 것은 모두 함께 모여 일하며 부르던 농요 ‘용두레질 노래’. “어이야 용두레~ 물올라 간다”하며 1년 농사짓는 과정을 노래로 부르는 선창자에게 화답하다보면 어느새 논에 물이차곤 했던 것. 마을을 찾은 사람들도 이 노래를 배워 부르며, 용두레질 체험을 해볼 수 있다.

경운기를 타고 마을 돌아보기, 갯벌체험하기 등 다양한 체험거리도 준비되어 있다. 용두레마을 인근에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5개의 고인돌군 중 하나인 오상리고인돌군과 고려 고종 19년 수도를 강화로 옮길 때 함께 옮겨온 하점면오층석탑(보물 제10호), 하점면석조여래입상(보물 제615호) 등이 있다. 화도면 여차리에 자리한 강화갯벌센터에도 들러볼 것. 6월말까지 저어새 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 문의

용두레마을 010-5447-2130

강화군청 문화관광과 032-930-3520

○ 주변 볼거리

심은미술관, 평화전망대, 강화화문석문화관, 전등사, 정수사

○ 교통

[서울-강화]

올림픽대로-48번국도-강화대교-인삼센터 삼거리 좌회전-인산저수지 끝에서 우회전(외포리 방면)-외포리 선착장 우회전-해안도로-황청리 삼거리 우회전-용두레마을


Posted by @topcpla PeachPrince
2009.05.21 07:29
 페트라는 십자군 전쟁 시에 잠깐 유럽인들에게 알려졌다가 1812년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가 발견하기 전까지 700년이란 긴 잠을 자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잊혀진 도시를 『시리아와 성지 순례, Travels in Syria and the Holy land)』라는 책에 적었는데 이 책은 젊은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로버츠(David Roberts, 1796~1864)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 데이비드 로버츠 
로버츠는 어느 면으로 보면 현대판 입지전 즉 신화와 같은 인물이다. 영국 에딘버그(Edinburgh) 주변에서 태어난 로버츠는 어릴 때부터 그림에 천재적인 소질을 갖고 있었지만 집이 가난하여 학교에 갈 수는 없었다. 실제로 그가 경력을 위해 학교 졸업장이라는 자격증을 얻은 것은 40살이 되어서였다.

학교에는 입학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지만 그의 그림 그리는 재주는 단연 돋보여 7년 동안 <에딘버그트러스트아카데미>에서 보수 없이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당대에 소위 문맹자가 아카데미란 이름을 건 기관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은 파격적인 일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 후 그의 인생은 그야말로 동화와 같다. 20살 때인 1815년에 인테리어 장식가로서 첫 직장을 잡고 곧바로 에딘버그에 있는 ‘판테온’ 극장의 미술가로 발탁되더니 1819년 즉 24살에 에딘버그 왕립극장의 화가로 임명되었다.

당대의 틀에 잡힌 사회구조로 볼 때 학력이 전무하고 배경이 전혀 없는 그가 왕립극장의 정식 화가로 대접받았다는 것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림에 대한 실력이 누구보다 탁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로버츠에 대한 전문가들의 인지도인데 그의 학력과 배경이 미천함에도 불구하고 1831년 <영국화가협회>의 회장으로 당선되었고 1838년에는 영국의 왕립아카데미 회원이 될 정도였다.

그는 공적으로 승승장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화가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유럽의 수많은 국가를 여행하면서 건물, 전경, 기념물 등을 스케치, 드로잉은 물론 그의 특기라 볼 수 있는 수채화에 담았으며 동판에 자신의 그림을 에칭하기도 했다.

페트라 그림으로 세계적인 화가로 성장

그에게는 어릴 때부터 꿈꾸던 목표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동경하던 이집트, 팔레스타인, 시리아로의 여행이다. 당대에 외국으로의 여행이란 일부 특권층이나 할 수 있는 것이었므로 그는 자신의 꿈을 위해 평소에도 자산을 모으는 데 열중했다.

1838년 8월 예상한 만큼의 자금이 모이자 그는 자신이 원하는 원정대에 합류한다.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그가 여행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모든 여행 자금을 대었으므로 그의 원정대라고도 부를 수 있다.

▲ 궁정의 무덤, 데이비드 로버츠의 그림으로 페트라를 통해 유명작가가 되었고 그를 통해 페트라가 세계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파리를 떠나 말타와 사이클레이드를 방문한 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다. 사실 모든 자금을 여행에 투입하였고, 여행을 끝낸 후 발간할 책이야말로 유일한 수입원이었므로 그는 잠시도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다. 그는 피라미드 등을 보고 나일강을 따라 아부심벨을 방문했다.

그는 방문지마다 철저하게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드로잉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가 고난스러운 여행을 마다하지 않고 그림 그리는 데 열중했던 그의 명성이 이미 당대에 상당히 알려져 있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카이로에 묵었을 때 그는 모스크 즉 회교 사원의 내부를 그릴 수 있도록 허락받은 최초의 유럽인이었다.

여행을 계속하던 그는 어렸을 때 큰 충격을 주었던 페트라를 잊을 수 없었다. 드디어 1939년 그는 그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는 여행길에 들어섰다. 그는 시나이 반도는 물론 사해, 베들레헴, 레바논을 거쳐 그가 고대하던 요르단의 페트라를 방문했다.
 
이때 그린 페트라의 그림이야말로 그의 역작 중의 역작이다. 그는 페트라를 거쳐 팔미라를 방문하려 했으나 불행하게도 열병에 걸려 팔미라를 방문하지 못하고 영국으로 철수했다.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여행하는 동안 작성한 각종 자료들을 발간했다. 그가 갖고 온 자료를 본 출판사가 그에게 제시한 선인세가 무려 3천 파운드나 되었다는 것은 당대의 전설이 될 정도로 엄청난 평가를 받았음을 알려준다.

당대의 전설이 된 선인세

결론적으로 그는 자신이 직접 그린 수채화 그림을 6권으로 발간했는데 이것이 그를 영국 사상 가장 유명한 풍경화가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었고 재정적으로도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는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으로 전시회를 열어 판매하기도 했는데 그의 고객 중에는 유명 작가인 찰스 디킨스(Char;es Dickens), 윌리엄 새커리(William Thackeray), 윌리엄 터너(William Turner) 등의 저명인사가 있었고 그들은 로버트와 평생 친구가 되었다. 그 후 그는 계속하여 세계 각지로의 여행을 계속하였는데, 그림을 완성하자마자 현장에서 곧바로 판매되는 신화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도 세월은 막을 수 없는 법, 1864년 64세로 눈을 감았고 노르우드(Norwood)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드로잉, 스케치, 수채화이지만 유화도 적지 않은데 대부분은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유명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사실상 페트라가 과거의 영광을 되찾은 것은 로버츠의 영향이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을 정도로 그의 페트라 그림은 압권이다.

페트라는 그 중심부에서부터 물이 말라버린 강(와디)들과 고대 대상로들을 따라 사방으로 수 킬로미터까지 뻗어 있는데 얼마 전에도 동굴에 거주하는 베둘족(베두인족 가운데 페트라에 사는 이들을 뜻함)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나바테아인들이 만든 물 저장 장치에 고인 물을 마시고 염소를 돌보며 지냈다.

페트라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자 요르단 정부는 인근 지역에 콘크리트 블록 집을 건설한 후 이들의 이주를 종용했다. 학교와 진료소를 건설해주자 결국 1천여 명에 달하는 이들이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들이 승낙한 이유는 극히 현실적인 그들의 요구조건을 요르단 정부가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옮기는 새로운 거주지에서 염소를 방목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콘크리트 블록 집보다는 자신들이 과거부터 살아오던 습속을 바꿀 수 없다는 설명이다. 물론 정부에서는 페트라 발굴단의 연구원으로 특채될 수 있도록 우대하고 막일할 때에도 우선권을 보장하며 행상도 반대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부가했다.

▲ 페트라의 베두인, 베두인들은 아직도 고대 유목민의 생활을 주장한다. 

페트라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사전에 정보 없이 다니다가는 길을 잃기 쉽다고 한다. 누군가가 실종되면 정부는 이 지역을 지키는 군인들에게 의뢰하는 것이 아니라 베둘족에게 수색을 의뢰한다.

그들은 페트라 지역을 잘 알고 있으므로 길을 잃어 탈수 증세라도 보이는 사람들을 발견하면 나름대로 치료한 후 낙타나 소형 트럭에 태워 데려온다고 한다. 안내인이 없이 페트라의 구석구석을 살펴보려면 반드시 낙오될 때 필요한 물을 챙기라고 조언하는 이유이다.

부르크하르트에 의해 재발견된 이후 페트라는 계속 발굴되었는데 1896년 <예루살렘성서고고학연구소>에서 최초의 보고서를 출간했다. 그 후 1897-1898년에 걸쳐 독일의 부른노우와 도마츠브스키에 의해 무덤과 건물들이 발굴되었으며, 계속하여 로마시대의 도시가 발굴되기도 하였다.

1929년 콘웨이와 호스필드에 의해 페트라의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졌고, 그 후 1982년에 이르기까지 로마 극장과 여러 유적들이 추가로 발굴되었지만 학자들은 도시 중심부의 75퍼센트 이상이 아직도 드러나지 않았다고 추정한다. 현재 미확인된 지역에 대한 발굴이 진행되고 있으므로 이 유적들의 모습이 나타나면 지금까지 알려진 페트라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줄 것으로 생각한다.

베두인의 고향

페트라가 있는 요르단은 전형적인 농업국이지만 사람이 살기에 부적합한 척박한 땅이 거의 75퍼센트나 된다. 국토의 면적은 남한보다 약 10퍼센트 정도 작은 8만9천 제곱킬로미터이고 인구는 2008년 기준 약 620만 명이다.

요르단은 크게 요르단 강, 팔레스타인 구릉 지대, 트란스 요르단 고원, 사막 평원으로 나누는데 팔레스타인 구릉 지대는 1967년 중동 전쟁 때 이스라엘에게 많은 지역을 빼앗긴 데다 팔레스타인의 활동 무대이므로 이스라엘과 항상 긴장 상태에 있다.

현재 요르단을 구성하는 인종은 팔레스타인과 베두인인 아랍인이 절대 다수이다. 이 중 베두인은 황량한 대지에 천막을 치고 이리저리 흩어져 유목 생활을 하면서 무력 사용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 것으로도 유명하다.

베두인은 낙타ㆍ양ㆍ염소 같은 가축을 키우며 먹이인 풀을 찾으면서 여러 지역을 돌아다닌다. 이들은 주로 물이 있는 오아시스나 말라 버린 강 주변에 천막을 치고 산다. 항상 이동해야 하므로 간이로 지은 집에 사는 것이 보통이지만 최근에는 정착하는 베두인 족들도 많아지고 있다.

베두인의 생활 중에서 흥미로운 것은 낙타나 염소의 털로 짠 천으로 만든 천막이다. 기둥과 지붕을 ‘단부’라 불리는 밧줄로 연결하는데 사막에서 길을 잃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이 단부를 잡는다. 그러면 집주인이 물이나 음식을 주면서 여러 가지 정보를 알려준다고 한다.

▲ 모세의 죽음, 학자들은 성서에 기술된 이집트 탈출 및 가나안 정복 등이 대체로 역사적 사실에 부합되므로 모세가 실존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베두인의 의상은 매우 독특하다. 현대화된 문명의 영향으로 최근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전통적인 복장을 고수하면서 살아간다. 남자들은 주로 목 부위에 단추가 달린 흰색으로 만든 기다란 ‘소브’라고 불리는 헐렁한 가운을 입고 다닌다. 그리고 모자를 쓰고 그 위에 널찍한 장방형의 무명천인 ‘구트라’를 쓴다.

여자들은 흰색 블라우스에 발끝까지 내려오는 다채로운 색깔의 드레스를 주로 입는다. 머리에는 검은 수건을 두르고 눈 주변에는 검은 화장을 한다. 거리를 다닐 때는 항상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데 이는 코란에 ‘여성은 음부나 가슴은 덮어 가리고 어버이, 형제, 남편, 아들, 노예 이외의 남성에게는 신체를 보여서는 안 된다’라는 가르침을 따르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베두인 여성들은 앞이마를 장식한 보석을 비롯하여 코걸이, 손가락과 발가락 반지, 코란 글귀가 새겨진 목걸이 등 보통 2~4개씩은 하고 다닌다.

요르단의 특징은 중동 국가이면서도 석유가 생산되지 않는 자원 빈국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근래 석유가 없는 대신 ‘죽음의 바다’로 알려진 사해(死海)에서 유용한 광물 자원이 대량으로 생산되어 화학 및 비료 산업이 발달했다. 이 부분은 뒤에서 다시 설명한다.

모세의 활동 무대

요르단은 성경의 주 무대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은 남쪽에서 지중해 연안까지의 여러 대상로를 장악했는데 그 중에는 모세와 관련되는 장소가 많이 있다.

모세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아니더라도 관심을 보이는 것은 그의 생애가 극적인 것은 물론 서양으로 구분되는 세계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모세는 『구약성서』의 다섯 책인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모두 모세와 관련되어 있는데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출애굽기》, 《민수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특히 최근의 고고학적 ·금석문학적(金石文學的) 연구 결과, 성서에 기술된 이집트 탈출 및 가나안 정복 등은 대체로 역사적 사실에 부합된다고 인정되어 모세가 실존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일반적으로 모세는 이집트가 자랑하는 제국시대인 제19왕조의 람세스 2세(재위 BC 1290∼BC 1223)로부터 박해를 받았으며 이스라엘인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일으키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시나이산(山)에서 신으로부터 십계명(十誡命)을 받는다.

▲ 여리고의 원경, 여리고의 유적지(산 정상 중앙)는 기원전 9000년경으로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도시로 추정한다. 

모세가 람세스 2세 시대의 사람이라면(이보다 약 100여 년 앞선 투모세스 3세 시대로 추정하기도 함) 모세의 이야기는 기원전 13세기에서 기원전 15세기로 추정하며 성경에 나타나는 여리고는 이 당시로 볼 수 있다.

그 후 모세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에돔·모압의 광야에서 40년에 걸친 유랑생활을 계속하다가 결국 자신은 가나안에 도달하지는 못하고 요단강을 건너기 전 여리고(Jericho) 맞은 편에 있는 모압 땅의 느보산(山)에서 120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의 유지는 이어져 후계자인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인을 이끌고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강력한 국가들과 전쟁을 치루는데 그 중 첫 번째 도시가 여리고이다. 성경에는 이스라엘인들이 나팔을 불고 함성을 지르자 여리고의 성벽이 무너졌다고 한다.

여리고는 현존하는 세계 도시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그 연대가 모세 시대가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는 신석기 심지어는 구석기 시대로 인식하는 기원전 9000년~기원전 7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엄밀한 의미에서 여리고는 현재 요르단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점령한 분쟁지역인 웨스트 뱅크(West Bank)에 있는 도시이다. 그러나 과거 성경의 무대를 현 국가 개념으로 단정하여 구분할 수 없으므로 이 장에서 설명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방어용 구조물

약 1만 5천년 전을 전후해 지구상의 기후가 온난해지면서 빙하가 녹기 시작하고 황량했던 지역에 초목이 자라고 야생 생물들이 살기 시작하면서 인간들은 새로운 생활방식들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수렵과 채집에서 농업으로 생활방식의 기반이 바뀐 것이다.

농업은 수렵에 비해 노동집약적이지만 일정한 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수단으로 적격이다. 인구가 증가하자 사람들은 촌락과 작은 도시들을 세우고 성을 쌓아 외부의 침입을 막고자 했다. 농업 생활로 식량의 저축이 가능해지자 이를 빼앗으려는 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한 것이다.

이러한 농업생활인들이 만든 방어용 구조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곳이 바로 여리고이다. 여리고인들은 기원전 9000년~기원전 7000년경 돌과 진흙벽돌로 성과 탑들을 건설했다. 그들은 또한 흙을 반죽하여 죽은 사람의 유골에 바른 후 자주색 조개껍데기로 눈을 만들어 붙였으며 머리카락과 수염은 적갈색으로 색칠을 했다.

여리고의 인구는 2천명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는 신석기시대 한 마을의 인구를 100~150명 정도로 추정할 때 거의 20배 이상의 인구가 한 지역에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연히 이들 공동사회를 통치할 수 있는 지배자가 등장하는데 이는 고대 전제사회로 들어가는 기본 여건이 조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계속)

참고문헌 :
 『세상을 바꾼 건축』, 클라우스 라이홀트 외, 예담, 2006
「요르단 사막 속에 꽃피운 중세 유적을 간직한 나라」, 허요한, 뉴턴, 1997년 11월
「여리고(Jericho)성의 상징적 특성에 관한 연구」, 남호현, 건축역사연구 제11권 4호 통권32호, 2002년 12월
『세계사의 100대 사건』, 리더스다이제스트, 1995
이종호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초빙과학자 | mystery123@korea.com

저작권자 2009.04.08 ⓒ ScienceTimes
Posted by @topcpla PeachPrince
2009.05.16 09:47
 관광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녹색 성장은 모든 분야에 적용되며 최근 관광에서도 저탄소관광과 같은 것이 핫 이슈이므로 스크랩하였음.


녹색 마인드 갖춘 녹색인재 양성해야…
행안부 주최 민간교육기관 대상 녹색성장 간담회 2009년 04월 07일(화)

▲ 지난 3일(금) 정부중앙청사 별관 3층에서 열린 ‘민간교육기관과 네트워크 강화를 위한 간담회' 

“녹색성장 시대에는 녹색인재가 필요하다.”

지난 3일(금) 정부중앙청사 별관 3층에서 행정안전부가 주최한 ‘민간교육기관과 네트워크 강화를 위한 간담회’에서 나온 말이다.

‘녹색성장 이해와 실천전략’을 주제로 한국생산성본부를 비롯해 56개 민간교육기관 관계자 약 150여 명이 참석한 이날 간담회에서 엑스퍼트 컨설팅의 이효선 소장은 ‘녹색성장과 HRD 전략’을 주제로 한 강의에서 “녹색시대에는 그 앞에 녹색이 입혀져야 하며 그에 알맞은 인재가 요구된다”고 말했다.

녹색경영은 품질경영-고객만족경영-지식경영 등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으며, 최근에 녹색성장 패러다임이 등장하면서 탄생한 말이라는 것. 따라서 녹색성장 시대에는 녹색 마인드와 녹색 목표를 갖고 녹색경영을 실천할 수 있는 인재가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 엑스퍼트 컨설팅 이효선 소장 
이 소장에 따르면 1980년대 전반부터 기업들은 품질향상과 원가절감 등의 큰 틀 속에서 품질경영을 펼쳐왔다. 그리고 1980년대 후반부터 등장한 경영기법이 고객니즈의 파악과 충족을 위한 고객만족경영.

이후 1990년대 후반부터는 변화하는 환경에서 경쟁력의 원천인 신지식을 창출하고 공유하기 위한 지식경영의 시대로 들어간다. 그리고 21세기에 들면서 그동안 경제성만의 추구에서 지속가능성 추구로의 경제성 패러다임이 진화하고 기후변화의 위기가 대두되면서 녹색경영기법이 등장했다는 설명이다.

이 소장은 “녹색경영의 배경에는 산업화 이후 자원 고갈, 유가 상승, 지구온난화 등의 환경문제와 친환경, 저탄소, 에너지 절감 등의 새로운 요구들이 깔려 있다”며 “환경보존과 지속가능 발전을 도모하자는 개념과 함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환경효율성, 녹색기술과 청정에너지로 신성장동력과 일자리를 창출하는 개념들이 포함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기업들이 그동안 추진해온 녹색경영기법은 녹색제품 개발, 녹색프로세스 개발, 녹색 이미지 개발 등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시키는 전통적인 개념이었다고 이 소장은 지적했다.

기업들의 녹색성장 개념 바뀔 필요 있어

“녹색경영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강조한 이 소장은 “정부나 개인과 달리 기업들은 오랫동안 녹색경영을 펼쳐왔는데 우리나라 기업들의 녹색성장 개념은 이제 바뀔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정부의 강력한 녹색성장 추진 기조 속에 소비자 시민단체의 요구, 국제 규격, 원자재 가격 상승 등의 압력요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주주만의 이익 추구에서 사회의 이익을 극대화시키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 이 소장의 견해다.

녹색부국 실현을 위해 기업의 녹색경영은 큰 부분을 차지하며 그 성공 조건은 녹색비전과 전략, 녹색시스템의 구축, 녹색인재의 양성 등의 3가지라는 것.

이 소장은 “이 교육의 자리도 그런 의미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고 “녹색성장 시대의 녹색인재는 녹색마인드(Green Mind), 녹색프랙티스(Green Practice), 녹색목표(Green Goal) 등의 3가지 요건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즉, 녹색인재란 기업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녹색전략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인재(Green Mind), 환경효율성을 고려한 최적의 프로세스를 창조적 사고를 통해 설계하고 실행할 수 있는 인재(Green Practice), 자신의 업무영역에서 달성할 녹색목표를 분명히 설정할 수 있는 인재(Green Goal) 등을 말한다,

더욱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녹색성장의 불가피성을 인식하고 녹색성장 및 녹색경영/행정의 핵심 내용을 이해하고 자사의 녹색 비전과 전략을 내면화할 수 있는 녹색 마인드를 갖고 있는 인재를 말한다..

또한 업무 영역에서 비녹색 문제를 발견하고 창의적으로 해결하는 가운데 문제 해결을 위해 타인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상호 베스트 프랙티스를 공유할 수 있는 인재 및 자기 업무 영역에서 추구할 녹색성과를 파악하고 달성할 녹색 목표를 설정할 수 있는 인재 등이 녹색인재의 조건이다.

녹색시대에 맞는 인적자원 개발로 변화

한편, 이날 행안부 오형국 인력개발관은 ‘녹색성장시대의 정부 인적자원 개발 방향’을 주제로 녹색성장 시대를 맞아 정부가 추구하는 올바른 인력 개발의 방향에 대해 소개했다.

오 국장은 서두에 “행정환경 변화에 따라 정부의 ‘인적자원 개발(Human Resource Development)’ 방향도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과거는 현재의 개인 업무관련 기술과 지식을 보완하는 차원의 인적자원 개발 방향으로 트레이닝과 개발 위주의 타율적 의미가 강했다는 것.

▲ 이날 간담회에선 녹색성장 시대에 맞는 인재의 조건에 대한 발표가 이어졌다. 

그러나 현재에는 조직의 미래투자를 위해 개인의 역량을 강화시키는 ‘러닝(Learning)’ 중심의 인력개발로 변화했다는 것. 하지만 녹색성장 시대로 진입하면서 전략적으로 국가의 미래 핵심가치를 확립하고 연계된 국가비전의 달성을 위한 역량 강화 쪽으로 바뀌고 있다는 설명.

오 국장은 또 “지금까지의 인적자원 개발은 당장의 업무 수행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 향상에 주목했다”고 지적하고 “이는 미래에 대한 투자개념이 부족해 미래 대응성에 취약하다”고 말했다.

따라서 “녹색성장 시대에는 지속가능한 성장을 뒷받침하는 지속가능한 HRD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면서 “미래의 핵심가치를 창출하는 인적자원 개발에 주력, 공공부문에서 도전적이고 성취지향적인 인재를 육성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전에는 인적자원 개발에 대한 높은 관심과 투자에도 불구, 만족할 만한 성과 창출은 미흡한 수준이었다는 것. 따라서 이명박 정부에서는 ‘녹색성장’이란 구체적 목표와 지향점을 제시, 정부의 인적자원개발 체제를 국가 비전 및 정책 추진방향과 연계해 추진할 것이라고 오 국장은 설명했다.

아울러 “녹색성장 국가 비전 실현을 위해서는 정부, 기업, 시민사회의 공조와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며 “공공부문, 시민사회, 기업, 학교 등 각 부문의 인적자원 개발이 유기적 협력관계를 유지해야만 실현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조행만 기자 | chohang2@empal.com

저작권자 2009.04.07 ⓒ ScienceTimes
Posted by @topcpla PeachPrince
2009.05.14 00:35

▲ 페트라의 시크, 페트라로 진입하는 유일한 통로로 약 1킬로미터나 미로처럼 이어진다. 
과학으로 보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사해와 아카바 만 중간에 위치한 페트라는 구석기시대부터 신석기시대 이후까지의 유적이 발굴될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이 가운데 특히 구약성서에서 에돔의 셀라(Sela)로 언급되는 시기를 학자들은 기원전 1400~1200년으로 추정한다.

이 지역은 또한 '바위에 거하는 자들'이라는 뜻을 지닌 '호리 족속'의 거주지였는데, <사사기> 1장에서는 "아모리 사람이 살던 지역은 아그랍빔 비탈부터 셀라를 거쳐 그 위쪽이었다"라고 적혀 있는 등 '아그랍빔 비탈의 바위'로 언급된다.

'바위'라 불리는 이 도시의 이름은 시실리의 디오도루스에 의해 최초로 언급되는데, 그는 나바테아인들이 기원전 312년 안티고누스 1세의 공격을 받고 그들의 생명과 음식과 가재들을 이 도시에 숨겨놓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곳을 구약의 셀라와 같은 장소로 본 사람은 교회사가 유세비우스였으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스라엘이 미디안의 다섯 왕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던 역사에서 이때 처형당한 미디안의 왕 레켐을 페트라의 왕으로 보았다.

페트라를 만든 수로

아라비아에서 이주해 온 유목 민족인 나바테아인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6세기의 일로 이들은 기원전 580년경 에돔족과 혼합되었으며 페트라는 기원전 400년경부터 종교적 중심지이자 수도로 자리 잡는다.

페트라가 동시대에 특별하게 중요시되었던 것은 유럽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을 연결하는 지역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수천 년에 걸쳐 계절적 급류인 와디 무사(Wadi Musa)에 의해 형성된 좁은 협곡을 의미하는 시크(Siq)는 도시로 진입하는 유일한 통로로 밖에서는 그 입구마저 잘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입구부터 높이 100미터에 이르는 구불구불한 사암 절벽이 1킬로미터나 미로처럼 이어져 있다. 그러면서도 식수가 많이 나와 도시를 지킬 만한 사람들이 살기에 충분했다.

대상들이 페트라를 통해 이집트의 기자, 지중해, 시리아는 물론 동쪽으로 여행할 수 있으므로 페트라는 통행요금 징수와 아스팔트의 무역을 통한 수입이 많아 도시 사람들은 아주 부유해졌으며 그들이 관장하는 지역은 현재의 시나이 반도에서 아라비아 반도 절반 정도에 달하는 50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했다.

▲ 페트라의 조각상과 수로, 페트라에서 가장 유명한 시크 안의 대상들을 조각한 것으로 하단 후면에 수로가 있다. 

페트라 자체는 작은 협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상주 인구의 규모에 한도가 있었으나 전성기 때에는 페트라와 연계되는 주변 지역에 무려 50여 만 명이 거주할 수 있었다. 페트라가 번성하게 된 열쇠는 나바테아인들이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페트라는 원래 연간 강우량이 고작 105밀리미터에 불과하지만 그들은 빗물을 마치 귀중한 곡물처럼 각지에서 거둬들여 저장할 수 있도록 테라코타로 만든 정교한 저수시설을 설치했다 일부 장소는 조각품처럼 잘 깎아 만들어 방문자들을 감탄하게 만드는데 시크의 중앙 부분에 있는 수로 옆의 대상(隊商)들의 조각은 페트라 최고의 걸작품으로 꼽힌다.

그들은 바위에 물이 고이도록 수백 군데를 오목하게 깎아 놓아 가뭄을 이겨낼 수 있었고 도시를 에워싸고 있는 산들에 석조 댐을 건설해 폭우 뒤에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는 물의 범람을 방지할 수 있었다.

요르단박물관의 아마르 박사는 페트라 안에만 200여 개의 저수시설이 있는데 이곳의 저장량은 약 4천160만 리터에 달하여 10만 명이 1년 동안 사용해도 충분한 양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식수만으로는 인근에 상주하는 50여 만 명의 식수를 공급할 수 없는데 그들도 주변에서 거대한 식수원을 사용했다.

가장 부유한 도시로 번창

낙타를 몰며 대상들에게 길을 안내하던 나바테아인들은 전설적인 유향로(乳香路)의 북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상들에게 사막에서 생존할 수 있는 비법을 전수해주었다.
 
그 비법은 다소 엉뚱하게 들리겠지만 페트라에만 도착하면 사막의 모래바람을 피할 수 있고 물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는데 사막을 건너다녀야 하는 대상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정보였다. 물론 그들의 제안은 공짜가 아니었다. 그들은 대상들로부터 통행료를 받았는데 이것이 페트라가 동시대에 가장 부유한 도시로 번창한 이유이다.

▲ 파라오의 보물, 헬레니즘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의 건축 전통을 따르고 있으며 파라오의 보물이 있다고 알려졌지만 나바티아 왕 하리스 4세의 무덤이었음이 밝혀졌다. 
해발 950m의 은닉처인 페트라는 높고 가파른 암벽들이 좁아지면서 도시 외곽에 어두운 골짜기를 형성하여 접근이 어렵고 적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하여 로마도 무력으로는 페트라를 정복할 수 없었다.

그러나 로마는 전투에 관한 한 고수 중의 고수였다. 2세기 초, 로마군은 여러 차례의 공격에도 함락되지 않자 페트라로 흘러드는 물줄기를 끊었다. 혹독한 식수난을 겪게 되자 결국 나바테아인들이 로마에 항복했다는 것이다.

페트라는 기원후 106년 트라야누스 황제 때 로마의 확장 정책의 일환으로 로마에 합병되었는데 학자들은 로마인들이 페트라를 정복한 것이 아니라 정략적인 면에서 페트라가 합병하는 데 동의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실제로 페트라를 방문하면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수로를 볼 수 있는데 이들 수로는 천혜의 빗물을 모두 받아 저장하기 위한 작품으로 페트라가 식수 때문에 로마에 항복했다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여하튼 로마에 정복된 페트라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방문한 이후 ‘하드리아누스의 페트라’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여하튼 페트라는 로마에 합병된 이후에도 페트라를 번영케 했던 무역로의 기능은 계속되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페트라의 통치세력이 나바테아인들로부터 로마인으로 교체된 것뿐이었다.

골짜기가 워낙 좁아 페트라에는 대규모의 독립적인 건물을 건설할 수 없었다. 그래서 주민들은 그들의 신과 망자들과 함께 바위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페트라의 암석은 파내거나 조각하기 수월한 사암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페트라에서는 바위를 깎아 무덤과 주거지를 만들었는데 현재 800개의 주거지와 무덤이 발견되었다. 도시 길이는 8킬로미터에 달하며 시가지 입구는 동쪽의 시크, 남쪽의 투그라, 북쪽의 투르크 마니에라라는 3개의 협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페트라는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 2세기 사이에 전성기를 누렸는데 당시 페트라의 인구는 3만 명을 넘었다. 페트라에는 포장도로, 목욕탕, 상점. 극장(2개), 장터(3곳), 궁전, 체육관, 계단식 정원 등이 있었다.

파라오의 보물과 로마 유적

현대인들을 감탄케 하는 유적은 장밋빛 사암을 새겨 만든 신전과 무덤의 정면부인 카즈네피라움(Khazneh Fir'awn, 파라오의 보물)으로 시크를 통과하자마자 나타난다. 이 건물 앞에는 넓은 광장이 펼쳐져 있는데 페트라인들은 붉은 사암에 높이 40미터, 너비 28미터의 정면부를 예술적으로 아주 화려하게 새겨 놓았다.

▲ 로마인의 극장 유적, 바위산을 반쯤 깎아 움푹하게 만든 건축물로 너비 40미터, 33개 계단에 약 6000명의 인원을 수용할 만큼 그 규모가 크다. 

정면부는 2개의 박공벽, 프리즈, 기둥, 조각상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면부 중앙에 대좌가 있고 그 위에 항아리가 있는데 베두인들은 그 안에 파라오의 보물이 있다고 생각했다.

정면부는 예술적으로 아주 화려하게 새겨 놓았지만 내부는 너무나 소박하고 간소하다. 이 건물은 헬레니즘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의 건축 전통을 따르고 있는데 이것은 17세기에 중세유럽에서 유행했던 바로크 양식과 유사하다.

건축 방법은 정면에서 굴을 파고 들어간 것이 아니라 천장에서 구멍을 뚫고 수직으로 깎아내렸는데 그 공간이 무려 1천700세제곱미터나 된다. 그러므로 이 건물은 건축된 것이 아니라 조각된 것이다.

원래 건물 자체가 파라오의 보물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으므로 페트라 안의 기둥에 있는 커다란 화병 조각 속에 보물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보물들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 건물은 근래의 발굴 조사에 의해 나바티아 왕 하리스 4세의 무덤이었음이 밝혀졌다.

카즈네피라움에서 협곡을 따라가면 열주대로의 서쪽 끝에 있는 신전 카스르알빈트피라움(Qasr al Binr Fir'awn, 파라오 딸의 성(城)이라는 뜻)이 있다. 바위를 깎지 않고 만든 유일한 건물로 이 도시의 주신(主神)인 두샤라를 모셨던 곳이다.

본전은 높이 23미터로 열주랑·전실(前室)·지성소로 이루어져 있고 신전 앞뜰에는 야외 제단이 설치되어 있다. 두샤라 신은 처음에는 돌기둥 모양을 했다가 나중에는 인물 모양의 숭배상으로 기려졌다.

신전의 이름으로 미루어 이 지역이 오래 전부터 문화적으로 이집트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지만 이와 같은 변화는 나바테아의 통치자가 족장의 신분에서 왕이라는 전제군주로 바뀐 정치적 변화 때문이다. 두샤라는 그리스의 디오니소스와 동일시되었으며 흉벽 무덤이나 계단 무덤의 자리에 그리스 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은 왕들의 무덤이나 무덤 신전들이 도입되었다.

학자들은 이들 무덤 건물들이 회로 칠해진 후 그 위에 그림들이 그려졌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바람과 모래 등 자연 침해에 의해 회벽이 사라지고 바위만 남아 당초의 설계자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환경으로 변모되었다는 설명이다.

▲ 아시리아 건축 예술로 건설된 유골함이 있는 무덤 전경. 

카스르알빈트피라 우측에는 2세기 초에 나바테아인들이 건설한 것을 이곳을 지배한 로마인들이 확충한 너비 40미터, 33개 계단으로 된 극장 유적이 남아 있다. 바위산을 반쯤 깎아 움푹하게 만든 건축물로 강렬한 인상을 주는데 약 6천명의 인원을 수용할 만큼 그 규모가 크다.

학자들은 이 극장을 각종 예술 행사나 오락적 행사를 위한 기능보다는 하나의 제의적 기능을 갖춘 장소로 인식하며 왕의 장례식은 물론 각종 회의 및 종교 의식을 치룬 것으로 추정한다. 극장 왼쪽에는 로마시대의 시가지가 있는데, 이곳에는 열주대로가 뻗어 있고 왕궁·신전·공공욕장 등의 유적이 있다.

사막의 경계 지역에 건설된 도시

도시의 서쪽 끝에 바위를 깎아 만든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장례사원인 앗데이르(ad-Dayr, 수도원) 유적이 있다. 카즈네피라움과 마찬가지로 암벽을 깎아서 만든 2층 건축물로 높이 50미터 길이 45미터이다. 1세기 말 오보다스(Obodas) 왕에게 바쳐진 신전 또는 무덤으로 추정하며 4세기부터 비잔틴 교회로 사용되었다.

이 계단 길은 좌우에 무덤과 제물을 봉헌하는 벽감들이 줄을 이어 있으므로 일종의 ‘성스러운 길’로 통한다. 그러나 ‘유골함이 있는 무덤(Tomb of the Um)'을 비롯해 페트라의 많은 무덤이나 장례 후 연회가 펼쳐졌던 석조 트리클리니움(triclinium, 의자가 3면에 달린 식탁이 있는 식당)의 계단 장식은 아시리아 건축 예술이다. 산의 정상에서는 이스라엘 지역까지 보이며 사해(四海)도 보인다.

영국의 고고학자 레오너드 울리(Leonard Wooley) 경은 이를 보고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바테아의 건축가들은 고전적인 건축물을 세밀히 분해하여 여러 조각을 낸 다음 처음 설계도의 기능과는 전혀 상관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결합시켰다."

영국의 레이야드 경(A. H. Layard)은 1887년 이곳을 방문하고 보다 감탄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물 등 사람의 생존에 필요한 것이 없는 사막의 경계 지역에서 바위에 극장, 신전, 공공기관, 무덤, 개인용 건물 등을 끈질긴 노동으로 건설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다.”

▲ 페트라의 키스 바위 
106년 로마에 정복 당한 후 페트라도 기독교를 받아들여 주교의 근거지가 된 동시에 한동안 계속하여 번창했지만 쇠락의 길을 피하지는 못했다. 로마가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리된 후 이 지역을 통치한 것은 동로마였는데 동로마는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페트라보다는 팔미라를 무역의 중심지로 변경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트라 지역은 계속 유목민들의 휴식처로 사용되었는데 363년과 551년에 강력한 지진이 이곳 지역에서 일어나 거주환경이 나빠지자 주민들이 페트라를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이러한 사실은 1993년에 발견된 6세기경의 파피루스 뭉치 150여 개에서도 증빙된다. 이 파피루스에는 데오도쿠스 가문의 7대에 걸친 기록이 들어 있는데 582년까지의 혼례 기록이 남아 있다.

학자들은 이들이 갑자기 페트라를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이주한 이유는 지진 등으로 거대한 저수시설이 파괴된 것을 보수하지 않아 모래에 파묻히자 더 이상 살 수 있는 거주 여건이 되지 못했다고 판단한다. 즉 그동안 페트라를 지탱하던 물이 말라버리자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설명이다.

여하튼 이 파피루스 속에는 6세기경 페트라 상류층들의 일상생활이 자세히 적혀 있으므로 파피루스의 내용이 해득되면 페트라의 많은 부분이 알려질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 이 파피루스는 요르단 수도 암만의 <아코르동양연구소>에 보관되어 있다. (계속)

참고문헌 :
  http://jesusloveus.org
『유네스코 세계고대문명』, 생각의나무, 2006
「페트라, 바위를 깎아 만든 고대 도시」, 돈 벨트, 내셔널지오그래픽, 1001년 10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베텔스만, 2003
「2000년된 고도 페트라 유적지」, 나비뉴스, 2007.5.17
『지중해』, 김성호 외, (주)에오스여행사출판부, 2007

이종호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초빙과학자 | mystery123@korea.com

저작권자 2009.04.06 ⓒ ScienceTimes
Posted by @topcpla PeachPrince
2009.05.11 21:03
인터뷰] 관광산업, 기후변화 극복이 대안이다

유가인상 및 전 세계적 금융위기로 인해 세계 관광산업은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경제상황이 미치는 영향보다도 더 장기적으로 악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기후변화이다.



 




 


 Q 기후변화가 생태관광을 포함한 지속가능관광에 새로운 이슈로 떠오르는 이유와 대처방안으로는 어떠한 것을 들 수 있나요?

A 기후변화는 생태계,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전반 및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수많은 사회적․환경적 가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또한 기후변화 현상은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발생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 지금부터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후변화를 극복하는 핵심 요소로 적응(Adaptation)을 들 수 있습니다. 기후변화에 대비하여 생태학적, 사회적, 경제적 시스템을 변화시키면서 관광산업 역시 이러한 적응 전략을 통해 잠재적인 혜택은 극대화하면서 부정적인 영향은 최소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조사연구 및 모니터링 활동을 통해 기후변화의 영향을 더 잘 이해하고 온실가스배출량 및 탄소 발자국 감축 노력이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Q  이러한 기후변화와 관련한 호주의 주요한 노력들은 무엇이 있는지요?

A 현재의 위기상황을 기회로 활용하기 위하여, 호주관광청(Tourism Australia)과 호주공원청(Parks Australia)에서는 파트너십을 구축하여 호주의 정수를 보여주고 독특한 자연 및 문화 경험을 제공하는 20개의 명소를 지정하였습니다. 각각의 명소들을 브랜드화하고 상품화하여 글로벌 관광객들에게 독특한 경험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호주 최고의 명소들을 담아내고 홍보함으로써 호주 및 주변 지역에 대한 보존 및 사회․경제적 성과를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Q  호주의 친환경 인증프로그램은 어떠한 것이 있습니까?

A 호주생태관광협회는 세계적으로 공인되는 ‘에코인증프로그램(ECO Certification Program)’을 포함한 다수의 인증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에코인증프로그램은 세계 최초의 친환경 관광 인증프로그램으로 그동안 매우 성공적인 결과를 낳았으며,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국제적인 생태관광표준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에코가이드(EcoGuide Australia)’ 인증 프로그램은 호주생태관광협회의 주력 프로그램으로, 자연 및 생태관광 가이드(Nature & Ecotour Guides)에 대한 업계주도형 프로그램이며 호주생태관광협회의 새로운 ‘주력(flagship)’ 인증 프로그램인 기후대책인증프로그램(Climate Action Certification Program)도 세계최초로 탄소배출량 감축노력에 대한 순위를 매기기 위해 고안된 프로그램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이미 수행된 탄소 감축의 규모나 수준에 상관없이 관광업계 전 부문이 참여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며,  그 대상으로는 관광호텔, 관광명소, 생태관광 운영자, 투어, 교통, 식당, 여행사, 각 주 및 지역 관광기구, 보호지역 관리자 및 산업기관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Q   친환경 관광인증이나 관광전략 수립을 위한 호주정부와 업계의 협력 형태는 어떻게 추진되고 있습니까?

A 현재 호주정부에서는 국가관광인증기반 정책실행그룹(National Tourism Accreditation Framework(NTAF) Working Party)을 통해 국가인증계획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연방정부 및 주 정부 대표 등을 포함한 관광 관련 기관의 대표들로 구성된 이 정책실행그룹의 목표는 업계와 정부간 파트너십을 통해 친환경 관광인증의 개발, 실행 및 운영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장기적이고 일관성 있는 관광정책에 대한 전략수립을 위해 호주정부는 주정부 및 연방 정부 대표와 관광업계 전 분야의 대표자들로 구성된 국가 장기 관광전략자문그룹(National Long-term Tourism Strategy Reference Group)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Q    마지막으로 간단한 정리 부탁드립니다.

A 세계금융위기, 불안정한 유가 변동폭 등으로 인해 세계 관광산업도 어느 때보다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기후변화가 전 세계 관광전략의 틀을 마련함에 있어 중요한 요인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관광객들은 이제 관광업계 전 부문에 걸쳐 자신이 이용할 관광 서비스가 친환경적으로 운영되길 기대하기 때문에  공급자 입장에서도 자신들의 비즈니스가 친환경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하는 시점이 도래한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앞서 언급한 각종 친환경 인증제도를 비롯 친환경 관광정책들은 미래의 관광산업에 있어 필수적인 경쟁요소로 자리 잡을 것입니다.



Posted by @topcpla PeachPrince
2009.05.11 20:59

[기 획] 구름도, 바람도 하동에서 놀다간다

느림의 미학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곳, 경상남도 하동에서는 5월 1일부터 5일까지, 닷새 동안 하동야생차문화축제가 열린다.


느림의 미학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곳, 경상남도 하동에서는 5월 1일부터 5일까지, 닷새 동안 하동야생차문화축제가 열린다. 이번 축제에서 한국관광공사는 평사리 청보리밭과 섬진강 걷기 이벤트를 펼칠 계획이다. 오는 황금연휴, 하동으로 ‘소풍’을 떠나는 것도 좋겠다.

 글 박지영




 


도로 위 자동차는 경적을 울리며 빠른 속도로 지나가고 머리 위 하늘에서는 그 보다 더 빠른 속도로 비행기가 날아간다. 빠르고 편리하며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지만, 늘 어딘가 마음은 허전하다. 도시인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경상남도 하동군에서는 5월 1일부터 5일까지 하동야생차문화축제가 열린다. 이번 축제는 ‘왕의 녹차와 함께 하는 여행(餘幸:여유와 행복)’을 주제로 화개면 차(茶)시배지, 차문화센타, 최참판댁 일원에서 펼쳐진다.
올해로 14번째인 하동야생차문화축제는 세트형 부스에 설치미술 형식을 도입하고 천혜의 자연경관을 조화롭게 배치해 색다른 분위기의 축제장을 연출한다. 게다가 이번 축제는 녹차와 저탄소 녹색성장 정책, 슬로시티 등이 부합된 주제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할 예정이어서 눈길을 끈다.
 이번 축제에서 한국관광공사는 ‘소풍’이라는 주제로 ‘평사리 청보리 밭과 섬진강 은빛모래 맨발로 걷기’ 이벤트를 개최할 예정이다.

한국관광공사가 주최하고 하동군이 주관하는 하동군 평사리의 ‘소풍’은 평사리의 청보리 밭과 섬진강의 은빛모래 백사장을 걷는 행사로서 한국관광공사와 하동군이 특별기획한 체험프로그램이다. 달구지 체험과 바람개비 소원적기 등을 경험해 볼 수 있으며, 강변에 특별히 마련된 찻집에서 왕의 녹차도 한잔 할 수 있다.

‘소풍’ 이벤트는 5월 1일부터 5일까지 닷새동안 매일 3회(11시, 13시 30분, 15시 30분) 각각 한 시간 씩 악양 청보리 들판과 평사리공원 백사장에서 무료로 진행된다. 문화해설가와 함께 스토리 텔링의 기회도 경험할 수 있다. 코스는 평사리 공원 →평사리 청보리 밭 → 음악이 있는 소달구지 체험 → 악양 부부송 → 맨발로 백사장 → 3개의 소망의 동산에 소원의 바람개비 꽂기(유료)  → 물끄러미 찻집(유료) → 모래로 두꺼비집 만들기이다.



 

‘대한민국 서정1번지’에서 고즈넉하게 걷기

신안 증도, 완도 청산도, 장흥 유치·장평, 담양 창평, 하동 악양면.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슬로시티로 지정된 지역이라는 것이다. 이중 하동 악양면은 올 2월 이탈리아에서 열린 슬로시티 국제조정이사회에서 국제 슬로 시티로 인증받았으며 지난 4월 15일에는 슬로시티 선포식을 마쳤다. 

강과 산, 바다를 한 곳에서 다 느낄 수 있어 ‘대한민국 서정1번지’라고도 이야기하는 하동은 천혜의 자연경관을 모두 갖추고 있어 어디를 가나 한 폭의 그림이요, 풍경화를 연상케 한다. 하동에서도 위와 같은 하동다움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은 단연 악양면 평사리 들판과 은빛 모래가 눈부신 섬진강 평사리 백사장이다. 또 이곳 ‘평사리’가 보다 애틋한 까닭은 소설 토지가 탄생한 곳이며, 민족의 애환이 고스란히 숨어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평사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은 최참판댁 사랑채다. 이곳에서 보는 평사리 들판과 섬진강은 보는 이의 기분을 충만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이런 평사리 곳곳을 실제 만져 보고 느껴보는 것은 색다른 체험이 될 것이다.

5월, 청보리밭 넘실거리는 하동군 평사리 들판에서는 어릴 적 타 보았던 소달구지도 타고, 풀피리도 불며 한가로이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만끽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산과 강이 만나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 연을 맺는 하동으로의 여행을 추천한다.




 

Tips  

오감만족 제14회 하동야생차문화축제

하동야생차문화축제는 ‘왕의 녹차와 함께 하는 餘幸(여유와 행복)’을 주제로 5월 1일부터 5일까지 5일간 열린다. 축제는 최고(最古) 차나무 헌다례식과 오후에 펼쳐지는 화려한 개막식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막이 오르고 다양한 축하 퍼레이드가 진행된다.

이 축제가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는 ‘야생녹차’라는 소재와 이를 가지고 만든 흥미진진한 체험프로그램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번 축제에서는 직접 차잎을 따고 차를 만들어가는 ‘내가 만든 왕의 녹차’, 녹차 명인과 함께한 다례체험, 왕의 녹차 마시기, 녹차 비누만들기, 녹차탁본 만들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체험해 볼 수 있다. 현재 인터넷(festival.hadong.go.kr)을 통해서 체험객 접수도 성황리에 이루어지고 있다.

하동군 관계자는 “하동군은 국내 차 산업발전과 차 문화 육성을 위해 계속 노력하겠다”며 “ 하동야생차문화축제를 세계적인 명품 축제로 발전시키고 하동을 국내 대표적인 관광 휴양도시로 만들기 위해 전 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동 가는 길-서울 남부터미널에서 4시간 30분 소요, 남해고속도로 하동 IC에서 평사리까지는 20분 소요된다.

Posted by @topcpla PeachPrince
2009.05.11 20:56

[대한민국 보고보고] 백두대간 주막을 찾아서

일본 여행의 상징은 '료칸'이다. 천년의 역사를 가진 료칸은 서구화와 편리성을 추구하는 오늘날에도 일본인들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다.


일본 여행의 상징은 '료칸'이다. 천년의 역사를 가진 료칸은 서구화와 편리성을 추구하는 오늘날에도 일본인들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다. 그렇다면 한국의 여행문화를 상징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주막이 정답이다. 그러나 시대에 맞게 진화된 료칸과 달리 한국의 주막은 이제 명맥이 끊겼다. 그 아쉬움 때문일까. 백두대간 죽령에 자리한 주막을 찾아 나선 발걸음이 가볍다.

글·사진 김산환




 

충북 단양과 경북 영주를 잇는 죽령은 역사가 전하는 백두대간을 넘는 첫 고개 가운데 하나다. 이 고개는 서기 158년에 처음 열렸다. 그 후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군사적 요충지로 각광을 받는다. 조선시대에는 문경새재, 추풍령과 함께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3대 관문의 하나였다. 

죽령이 영남과 한양을 잇는 중요한 길목이 되자 선비나 관리, 장사치들로 북적거렸다. 또 그 길손들이 목을 축이고 허기를 달래던 주막이나 객점, 마방, 떡집, 집신가게 같은 것들도 넘쳐났다. 풍기에서 죽령을 오르는 길에만도 네곳의 주막이 있었다고 하니 그 흥청거리던 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다. 

이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죽령은 1941년 중앙선 철도가 놓이면서 홀로 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는다. 2001년에는 중앙고속도로가 이 구간을 터널로 지나면서 고개는 점점 잊혀졌다. 그렇게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던 죽령이 최근 다시 생기를 되찾았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 희방사역에서 죽령 정상에 이르는 죽령 옛길을 복원하면서 다시 길손이 붐비기 시작한 것이다.



 

주막에서 피로를 풀다

죽령 옛길은 희방사역에서 시작한다. 철길 곁으로 난 농로를 따라 가면 죽령 옛길 이정표가 나온다. 이정표를 지나면 군데군데 장승이 서 있다. 길은 사과과수원 복판을 가로질러 나 있다. 가을에는 탐스런 사과가 주렁주렁 열려 길손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사과과수원을 빠져나오면 비로소 옛길다운 길이 나타난다. 낙엽송 숲을 지나면 이제는 칡넝쿨 차지가 된 느티정 주막터다. 주막터를 지나면서 다리쉼을 하라고 설치해 놓은 벤치가 눈에 띈다. 죽령에 얽힌 전설이나 소백산의 생태계를 알리는 친절한 안내판도 심심할만하면 나타난다.  부드럽게 이어지던 오솔길은 다시 낙엽송 숲으로 들면서 가팔라진다. 호흡이 가쁘게 느껴질 무렵이면 주막거리에 닿는다. 이곳은 마지막 주막이 있던 자리다. 주막터에는 지금도 돌담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축대도 원형 그대로다. 돌담과 축대의 규모로 보면 주막거리가 제법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 하룻밤 묵어가며 객고를 풀었던 길손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주막거리를 지나면 길은 조금 더 가팔라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다. 계단을 내처 오르면 갑자기 시야가 툭 터진다. 어디선가 흘러간 노랫가락도 들린다. 죽령 고개에 닿은 것이다. 중앙고속도로 개통 이후 차량 통행이 뜸한 도로 건너에 주막이 있다. 초가로 이엉을 얹은 이 주막은 ‘진짜 주막’이다. 그 주막과 마주하는 순간 갑자기 시장기가 몰려온다.

따끈한 국밥 사발에 파전과 동동주를 곁들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마음만 그런 게 아니다. 힘들게 옛길을 걸어 고개에 닿은 이들은 그렇게 피로를 풀고 나서야 하산을 한다. 

고개에서 되돌아와 옛길의 계단을 내려서면 어둑어둑한 숲이다. 오솔길은 급하게 시간을 거꾸로 되돌려 과거로 이끈다. 노랫가락이 아득해지면서 다시 옛길이 환해진다. 



 

Tips   

● 기차여행이 편리하다. 중앙선 기차를 이용, 희방사역에 내린다. 옛길을 걸어 죽령에 오른 후 버스를 타고 단양역으로 향한다. 단양역에서 중앙선 기차를 이용한다. 죽령~단양역~단양터미널로 가는 버스는 1일 4회 운행된다.


● 자가운전으로 갈 경우 중앙고속도로 풍기IC로 나와 5번 국도 단양 방면으로 향한다. 희방사역 이정표가 나오면 좌회전, 200m 가면 희방사 주차장이 있다.


● 죽령 옛길은 2.5km. 초등학교 저학년도 걸을 수 있을 만큼 수월하다. 대부분 자녀와 동반한 가족여행객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정상까지는 어른 걸음으로 40분 내외다. 죽령 정상에 죽령주막(054-638-6151)을 비롯해 휴게소가 있다.  


● 풍기읍에는 인삼을 이용한 식당이 많다. 풍기읍에 있는 ‘풍기인삼갈비’(054-635-2382)는 인삼과 갈비의 궁합을 추구하는 집으로 최근 입소문을 타고 있다. 희방사 입구에 있는 소백산풍기온천(054-639-6911)은 지하 800m에서 끌어올리는 알칼리성 유황온천수로 비누를 사용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물이 부드럽다.

● 소백산국립공원 054-638-6196





 

Posted by @topcpla PeachPrince
2009.05.01 20:50
정갈한 한정식 같은 '도쿄전력관' [독자투고] 전기를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곳 2009년 04월 03일(금)
지난 겨울방학때 실시된 대학생 과학 봉사 '과활마당'에서 최우수상(교육과학기술부장관상)을 차지한 '여수신기'팀. 부상으로 일본 해외연수에 나선 여수신기 팀이 동경 국립과학박물관을 탐방기를 보내왔다. <사이언스타임즈>는 대학생의 눈으로 본 선진 과학박물관의 모습을 게재한다. 우리 나라의 과학박물관과 비교해보면서 읽으면 더욱 재미있을 것이다. [편집자 註]

▲ 전력관의 독특한 외관 
도쿄에서 ‘젊음의 거리’라고 불리며 번화한 지역인 시부야는 화려한 네온사인들과 수많은 광고판들이 넘쳐나는 곳이다. 그 많은 네온사인들이 빛을 발하기 전, 시부야 거리에서 가장 번쩍이는 곳인 전력관을 향해 크게 한 번 숨을 들이키며 일본 연수의 첫 발을 떼었다.
 
햇빛을 받아 유난히 반짝이는 외관부터가 전기를 금방이라도 뿜어낼 것만 같았다. 이러한 독특한 외관은 건축가 기지마 야스후미의 기본 구상 아래 설계된 것으로, 거대한 외벽은 삼각형의 유리창을 각각 연결시켜 만들었고 꼭대기는 티타늄으로 만든 둥근 돔으로 꾸며놓았다.

문득 건축가는 분명 과학에 식견이 꽤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빛의 반사의 아름다움을 건물 디자인에 적당히 접목시킨 능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력관 자체는 전체적으로 화려하지는 않지만 깔끔해 보였다.

전력관은 에너지와 전력 산업에 대한 이해를 돕고, 생활 전반에 걸친 전기의 역할과 중요성을 홍보하기 위해 동경전력이 1984년 세운 것이라고 한다. 도쿄의 전기 공급 및 전력체계, 발전기에서부터 최신 전자기기까지 전기에 관한 다양한 것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단순히 전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다양한 놀이기구와 체험 시뮬레이션을 통해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전기의 세계에 빠져들 수 있다.

전시물에 녹아든 기초 전기이론

우리는 천천히 가장 위층인 7층부터 둘러보기 시작했는데, 먼저 송전· 배전에 사용되는 실물 기기들을 직접 볼 수 있었다. 또 평상시에는 보지 못하는 발전소의 내부 모습이 생생하게 옮겨져 있어서 화력, 수력, 원자력을 비롯해 지속가능한 신생 에너지까지 발전 방법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가능했다.

6층에서는 그 중 원자력 발전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었는데, 실제로 방사선의 양을 측정해볼 수 있는 전시물도 있었고, 무엇보다 6층과 7층에 걸쳐 원자로를 1/3로 축소해 놓은 모형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둘러보는 동안 조금은 딱딱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기초적인 전기 이론을 어쩌면 이렇게 전시물에 잘 녹여 놓았을까 하는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 다양한 놀이기구를 직접 만지고 체험할 수 있다. 벽면에 위치한 것이 지문인식 센서가 달린 장난감 박스이다. 
5층으로 발길을 옮긴 우리는 동심의 세계로 다시금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매직컬 스퀘어(Magical Square)라는 이름에 걸맞게 신기한 것들로 가득했다. 인공지능 강아지, 지문인식 장난감 박스, 번개 생성의 원리를 시뮬레이션으로 꾸며 놓은 터치스크린 등 다양한 놀이 기구들을 직접 보고 만지고 느끼면서 전기를 마음껏 즐겨볼 수도 있었다. 아이들에게 큰 흥미를 일으킬 수 있는 좋은 교육 기회가 될 것 같았다.

어느덧 4층에 이르렀을 때, 눈이 더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흔히 말하는 여자들의 주방 욕심을 부추긴다고나 할까. 최첨단 가전제품들과 주방기구들은 한 번쯤 인테리어 잡지에서나 보았던 고급스러운 주방을 상기시켰다.

전기가 일상과 밀접해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 그런데 전시되어 있는 주방 기구들 중 일부에 사용 흔적들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우리가 방문한 날에는 볼 수 없었지만 여성들을 대상으로 요리 교실이 진행된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3층은 계속된 관람에 지친 관람객들을 위한 잠깐의 휴식 공간이라 할 수 있겠다. 허브차를 마시면서 책도 한 권 읽고 여유롭게 스파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다른 층과는 달리 유료로 운영되고 있어서 간단히 둘러본 후 아쉽지만 발길을 돌려야 했다.

민간 기업 운영, 무료 개방

전력관을 국가가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도쿄에 전력을 공급하는 민간 기업이 운영하고 있다는 걸 알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기의 역할과 중요성을 홍보하기 위해 무료로 개방되어 있다는 점 또한 높이 평가할 만했다.

관람 후 전력관에 대한 전체적인 느낌은 정갈한 한정식을 배불리 먹고 나온 것 같았다. 화려하지 않지만 알찬 구성의 한정식 같아서 전력관에도 관람객이 끊이지 않는 듯했다. 달리 표현하자면 특별하지만 대단히 특별하지는 않았고, 평범할 것 같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아서 더 매력적인 곳이기도 했다.

▲ 전기와 관련된 우리의 일상을 나타낸 아기자기한 모형들이 깔끔하게 전시되어 있다. 

우리 생활 속에 가장 가까이 있는 에너지인 전기, 하루에도 몇 번씩 콘센트에 코드를 꽂으면서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다. 하지만 전력관을 즐겁게 관람하면서 잊고 있었던 전기를 조금은 다른 관점으로 새롭게 바라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황애솔 과학봉사단 학생 기자(성균관대 4)

저작권자 2009.04.03 ⓒ ScienceTimes
Posted by @topcpla PeachPrince
2009.05.01 20:16
하동군, '국제슬로시티 총회' 유치 나서 2009년 04월 02일(목)

경남 하동군이 내년 개최 예정인 국제슬로시티 총회 유치에 나선다.

2일 하동군에 따르면 내년 6월 26일부터 29일까지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제12회 국제슬로시티 총회'를 유치하기 위해 6월께 총회유치단을 구성해 본격적인 유치활동을 벌이기로 했다.

하동군은 슬로시티 한국본부에 청정 자연환경과 전통음식 생산지 등을 고루 갖춘 하동이 총회 개최의 최적지임을 강조하고 협력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특히 하동군은 슬로시티 정신에 맞도록 총회 장소로 최참판 댁이나 인근 초등학교를, 숙박지로 쌍계사의 템플스테이, 최참판 댁, 청소년수련원을, 리셉션 등 이벤트 장소로 다원이나 섬진강 평사리 공원을 각각 활용할 계획이다.

운영요원도 지역 주민 뿐 아니라 다문화 가정, 장애인, 청소년 등 저변 층으로 확대해 정체성과 의미를 부각시키겠다는 구상이다.

이와 함께 녹차, 홍차, 커피 등 각국의 차를 다양하게 소개하는 프로그램과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하동 녹차를 활용한 다원 전통음식 시식회를 열어 볼거리와 먹거리도 선보일 계획이다.

우리나라 도시가 국제슬로시티 총회 유치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슬로시티로 지정된 전남 담양.장흥.완도.신안군과 경남 하동 등 5개 지자체가 유치를 희망하고 있다.

한국슬로시티본부와 국제슬로시티연맹이 공동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에서 후원하는 총회에는 세계 20여 개국에서 130여 명의 슬로시티 관계자가 참석할 예정이다.

한편 슬로시티는 자연 속에서 느린 삶을 추구하는 도시란 의미이며, 슬로시티 인증은 전통음식과 생활방식을 지키는 지역에 준다.

(하동=연합뉴스 제공) 지성호 기자 | shchi@yna.co.kr

저작권자 2009.04.02 ⓒ ScienceTimes
Posted by @topcpla PeachPrince
2009.04.28 21:50
한국은 왜 외국인 관광객에게 인기가 없을까?
한국의 투어리즘, 파트 1
09.04.28 11:19 ㅣ최종 업데이트 09.04.28 11:19 마티아스 슈페히트 (mati)

한국 밖에 가끔 나갈 때마다 사람들은 "아시아 탐험"을 하고 싶다면서 어디로 갈지 고민중이라고들 말한다. 태국 어때! 해변이 근사하니까~ 아님 중국! 요즘 중국이 대세던데~ 아님 일본!-아냐, 일본은 아냐… 거긴 물가가 너무 비싸…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음, 한국은 어때?"라고 제안하곤 한다.


그럼 보통 대답은 이렇다: "한국… 어… 생각 못해봤네~", 혹은 "한국, 한국에 뭐가 있지?"… 그럼 나는 "한국에 내가 있잖아… 나 거기 산다고!"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농담은 잠시 접어두고 현실을 직시해보자- 아시아의 확연한 미와 두드러지는 독특함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관광국가가 아니다. 서양인의 관점에서 보면 한국은 불행히도 세련됨과 유적지로 유명한 일본과, 뜨거운 해변, 열대의 즐거움의 상징인 태국 혹은 인도네시아 중간에 껴있다.


결과로 사람들이 한국에는 그다지 많이 오지 않게 되니 그것은 또한 어떤 의미에서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한국은 관광 산업 수입을 잃고 있으며, 그것은 전체 GDP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 이상으로 심한 문제점이 있으니: 관광 여행은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나라를 재발견하고 경험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다른 나라에 가보는 것이 보통 부정적인(그리고 틀린) 선입견들을 줄여줄 뿐 아니라, 어떤 나라에서 즐거운 경험을 한 사람들은 돌아가게 되면 보통 그 나라의 "대사" 노릇을 하게 되는 것이다. 친구들과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여행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그리고 어떤 사람들을 만났는지 말하고, 그러면 그 나라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쌓는 데도 도움이 된다.


그럼 왜 한국은 관광 목적지로 인기가 없을까? 한국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견줄 만한 게 없다는 말은 너무 쉽게 생각해서 나온 말일 뿐 아니라, 내가 볼 때는 사실도 아니다. 대신 나는 이것을 설명해줄 만한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① 지금껏 한국 정부가 관광 사업 발전에 중점을 두지 않은 것이 명백하며(예를 들어 태국 등에 비교해보면) 한국을 흥미로운 장소로 "브랜드화"시키지 못했다.


나의 의견: 당연히 정부가 한국의 전체적 관광 시설기반에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외국에 한국을 마케팅하고 브랜드화 시키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 불행히도 유럽이나 미국에서 신문광고 등은 아직도 아주 드문 일이며 영어를 쓰는 사람이 듣기에 좀 웃긴 "Korea Sparkling"이라는 슬로건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서울의 관광 지점은 거의 숨어있다. 도쿄를 예로 들자면 역사적 관광지들은 밤새도록 밝게 불이 켜져 있어서 아주 인상깊게 볼 수 있지만, 서울에서는 밤에 스카이 바에서 경복궁을 찾기조차 불가능하다.


② 많은 한국인들이 자국에 대한 "관광 마인드"가 부족하다. 가끔 한국에서 평생을 산 사람들보다 내가 더 여행을 많이 다니고 이 나라에 대해 더 잘 아는 점이 있다는 걸 왕왕 발견하곤 한다.


나의 의견: 한국인들이 자국을 여행하면서 쓰는 돈은 결과적으로 나라의 관광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작은 마을과 지방에서 지방 본연의 차별되는 색깔(관광사업 목적으로)을 만들도록 노력하고 자주 가는 여행지들은 좀 더 다양한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하면 국내 여행이 더 흥미로워질 것이다. 경주를 예로 들자면 경치와 역사 유적은 끝내주지만, 음식점마다 다 쌈밥 밖에 없고 별로 즐길 거리가 없는 것 같아 조금은 안타까웠다.


이상의 짧은 글에서는 한국이 왜 관광국가로 더 인기를 얻지 못하는지에 대한 나의 짧은 소견을 적었다. 이 외에도 한국 관광을 더 재밌고 성공적으로 만들기 위한 좋은 의견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 의견들이 모이고 반영되어 앞에서 지적한 사항들이 개선된다면, 앞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한국에는 외국인 관광객들을 끌어모을 만한 충분한 매력이 있다. 그 매력을 어필하지 못하고 관광객을 잃는다면 한국의 입장에서도, 그 매력을 모르고 지나친다면 관광객 입장에서도 결국엔 큰 손해가 아닐까, 한국 관광사업이 계속 발전해가기를 기원한다.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수원성의 멋진 모습
ⓒ 마티아스 슈페히트
수원성

Posted by @topcpla PeachPri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