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4. 13. 20:58
몽골 대여행의 시대가 열리다 유라시아를 연결, 정치·경제·문화권 통일 2009년 03월 30일(월)
인문학과 과학이 서로 협력, 미래를 만들어가는 인문강좌 행사가 최근 줄을 잇고 있다.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행사는 한국학술진흥재단이 주최하는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 학문 간 경계를 넘어, 세상과 대화를 시도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엿보이고 있다. <사이언스타임즈>는 석학들이 진행하는 인문강좌를 연재한다. [편집자 註]

석학 인문강좌 28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된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에서 서울대 김호동 교수(역사학)는 몽골제국의 건설이 결코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칭기스칸이 오논 강가에서 부족 통일국가의 깃발을 펄럭인 것이 1206년이고, 쿠빌라이가 항주를 함락함으로써 남송을 무너뜨린 것이 1276년이라면, 몽골제국이 건설되는 데 적어도 70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것.

▲ 1200~1480년 몽골제국의 영토 

그동안 세계 각지에서 진행된 정복 전쟁이 얼마나 많은 파괴와 피해를 가져왔을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데, 몽골군은 도시와 농촌 등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을 닥치는 대로 파괴한 것은 물론,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특히 비가 부족한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건조지대에서는 운하와 수로를 굴착하고, 그것을 정기적으로 보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몽골군은 도시를 공격하기 위해 강둑을 막고, 제방을 터뜨리는 전술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초기의 대대적인 정복전이 끝난 후에도 작은 규모의 약탈과 파괴는 끊이질 않았다. 정치적인 우위에 있었던 유목민은 농경민의 입장을 무시한 채 강압적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후 몽골인들은 이 같은 행동이 어느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몽골 지배층 약탈, 파괴에서 평화 시대 선언

농경민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생산 활동을 방해하지 말아야 자기들이 필요로 하는 물자와 식량을 공급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269년 주치, 차가타이, 우구데이 가문에 속한 세 울루스(부족) 대표들이 탈라스 강가에 모여 몽골인들의 약탈적 파괴에 대해 엄한 처벌로 다스리겠다는 내용에 합의한다.

그리고 역사상 가장 큰 면적을 차지했던 몽골제국의 평화시대가 시작된다. 14세기 유럽의 역사가들은 이를 ‘팍스 몽골리카’, 즉 몽골의 평화라고 불렀는데, 다른 어느 때보다 안전하게 동서양을 여행할 수 있는 신 실크로드 시대가 열렸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 평화시대를 번창하게 한 것이 역참제도다. 몽골인들은 수백 km가 넘는 장거리를 이동하기 위해 중간 중간에 휴식을 취하거나 말을 갈아 탈 수 있는 일종의 릴레이 시스템, 즉 역참이라는 것을 설치했는데, 그것을 몽골어로 ‘잠'이라고 불렀다.

김 교수는 몽골인들의 역참이 언제 처음으로 건립되었는지를 밝히기는 어려우나, 이미 칭기스칸 시대에 역참을 활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역참제도를 제국의 기간 교통망으로 완성시킨 장본인은 2대 군주였던 우구데이였다고 말했다.

우리는 사신들이 달릴 때 백성들(이 사는 곳을) 따라 달리게 한다. (그렇게 되면) 달리는 사신의 이동도 지체된다. 나라 백성들에게도 고통이다. 이제 우리는 완벽하게 정비하여 방방곡곡의 천호로부터 역참지기와 역마지기를 내어, 자리자리마다 역참을 두어 사신이 쓸데없이 백성를 따라 달리지 않고, 역참을 따라 달리게 하면 옳지 않겠는가? [유원수 역, ‘몽골비사’ 중에서]

우구데이는 역참루트를 확장해 제국 전역을 커버하는 광역적 교통 네트워크로 변모시켰다. 그의 치세 때는 제국의 영토가 서쪽으로 더욱 확대돼 러시아까지 그 지배 아래 들어오게 되었기 때문에, 역참망도 중앙 아시아를 거쳐 저 멀리 흑해 연안의 초원까지 연장됐다.

역사상 전례 없는 거대 교통망 구축

▲ 몽골 칸이 수도사를 통해 로마 교황에게 전달한 편지 
또한 중국과의 전쟁을 원활히 수행하고, 그곳에서 거둬들이는 공납물자를 몽골리아로 수송하기 위한 역참망도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역참망은 우구데이가 새로이 건설한 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으로 집중됐다.

북중국과 카라코룸 사이에는 30km마다 역참 하나씩을 설치해 모두 37개 역참을 두었는데, 이것을 이용, 매일 식량과 음료를 가득 실은 500량의 수레가 카라코룸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 같은 역참망은 이후 몽골제국 확장과 더불어 더욱 확장됐으며, 마침내 유라시아 대륙을 대부분 커버하는 역사상 초유의 거대 교통망이 탄생한다.

몽골제국은 상이한 여러 민족이 서로 만나고 뒤섞이며 살아가던 ‘다민족 제국’이었다. 몽골제국은 인종이나 언어에 관계없이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을 통치의 협력자로 받아들이는 데 전혀 거리낌을 두지 않았다.

칭기스칸이 처음 부족들의 통일 위업을 달성했을 때 몽골인들의 숫자는 모두 합해도 100만 명을 넘지 않았다. 그 정도의 인구로 유라시아를 지배하는 대제국을 통치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당연히 함께 통치할 파트너를 필요로 했고, 그 파트너는 중국인뿐만 아니라 ‘여러 종류의 눈 색깔이 있는 사람들’, 즉 ‘제색목인(諸色目人)’에까지 확대됐다.

제색목인에 속하는 집단으로는 티베트, 위구르, 킵착, 강글리, 알란 등이 있었고 이란, 아랍 계통의 무슬림들도 많았다. 유럽인들도 없지는 않았으나, 수적으로 다수는 아니었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던 몽골제국은 다양한 언어와 문자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몽골의 지배층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번역과 통역의 정확성을 강조했는데, 그것은 어떤 학구적인 태도에서 비롯됐다기보다는 지배자의 명령을 정확히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다양한 사전으로 언어 소통 해결

몽골제국 전역에서 언어사전 등 다양한 책자들이 편찬됐다. 쿠빌라이 치세 때는 몽골어와 중국어 단어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 ‘지원역어(至元譯語)’가 편찬됐다. 1308년에는 쿠빌라이 시대 때 만들어진 ‘국자(國字)’, 즉 파스파 문자로 한자를 표기하기 위한 ‘몽고자운(蒙古字韻)’이라는 책이 편찬됐다.

‘사림광기(事林廣記)’도 중국의 100가지 성씨의 정확한 음을 파스파 문자로 어떻게 표기하는지를 적어서 리스트로 만든 것이다. 1998년 한국의 대구에서는 ‘노걸대(老乞大)’의 원나라 시대 간본이 발견됐는데, 이것은 고려 말기 사역원에서 중국어 학습을 위해 편찬한 것이었다.

유라시아 서부 지역에서도 다언어 사전들이 편찬됐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무가디맛 알 아답’이라는 사전인데, 이는 12세기 페르시아 학자인 알 자막샤리가 아랍-페르시아-투르크어 사전으로 만든 것인데, 후에 차가타이어와 몽골어가 추가됐다. 13세기 후반과 14세기 전반에 걸쳐 만들어진 '코덱스 쿠마니쿠스'는 페르시아어-이태리·라틴어-중세 고지 독일어 단어들을 병렬시켜 놓은 사전이었다.

몽골이 지배하던 13~14세기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대여행의 시대’였다. 15~16세기 ‘대항해의 시대’가 열렸던 것은 이전의 ‘대여행의 시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거에도 비슷한 여행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원전 2세기 동서를 넘나든 장건(張騫)을 비롯해 많은 불승들, 기독교인들, 그리고 상인들의 여행은 몽골시대 여행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몽골시대 여행의 특징은 "유리시아 대륙의 끝에서부터 끝까지를 잇는" 사상 최초의 여행이 가능했다는 점에 있었다. 즉 유럽인들이 몽골리아와 동아시아를 방문한 것이었다. 카르피니, 루브룩, 몬테 코르비노와 같은 선교사들이 그랬고, 마르코 폴로와 같은 상인들이 그랬다.

대여행의 시대에서 대항해의 시대로

이들이 남긴 여행기록은 유라시아에서 아프리카까지 새로 포함시키는 새로운 세계관을 낳게 했다. 몽골시대에 중국은 유럽과 아프리카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게 됐으며, 이슬람권에서는 중국의 역사·의학·농업 분야 서적들을 번역했으며, 무엇보다 유럽은 처음으로 지중해권 너머 동방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다.

▲ 서울대 김호동 교수(역사학) 
이처럼 동서양을 넘나드는 여행이 가능했던 것은 ‘팍스 몽골리아’, 즉 몽골의 평화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유라시아 전체가 하나의 정치적 시스템으로 포용된 적은 없었다. 더구나 해상을 통한 여행길도 열려 있었다.

그리고 이 대여행의 시대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여행, 랍반 사우마의 유럽여행, 이븐 바투타의 동서양을 넘나든 대여행을 가능하게 했다.

동서양의 교류도 급속히 확대됐다. 특히 무슬림의 상업 활동은 내륙 실크로드뿐만 아니라 해상로까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육상교역을 좌우했던 무슬림 상인들은 무엇보다 몽골 귀족층이 좋아하는 사치품들을 취급했고, 그 중에서도 보석류는 막대한 이윤을 보장해주었다. 특히 이란어로 ‘랄’이라 불리던 루비는 중국에서도 ‘랄’이라고 불리면서 매우 높은 가격에 거래됐다.

인도양을 거쳐 말라카 해협을 건너서 중국의 동남해안으로 이어지는 해상로 역시 아랍, 페르시아 상인들로 넘쳐났다. 나침반의 발명, 조선술의 발달, 해도 제작 등으로 항해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결과였다.

해상을 통해 거래되는 상품들은 육상로보다 훨씬 다양했다. 곡식과 같은 농산물이 포함되기는 했지만 상인들이 무엇보다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직물, 자기, 금속제품과 일상 제품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상품은 자기였다. 1976년 전라남도 신안 앞 바다에서 발견된 선박에서 모두 2만2천여 점의 물건이 발견됐는데, 이 중 1만8천여 점이 청자·백자·청백자였다.

이강봉 편집위원 | aacc409@naver.com

저작권자 2009.03.30 ⓒ ScienceTimes
Posted by @topcpla PeachPrince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ghd 2013.07.19 03: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슬퍼서 우는거 아니야..바람이 불어서 그래..눈이 셔서..

  2. ugg boots 2013.07.21 08: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금은 반짝반짝 빛이 나겠지,,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빛은 사라저버릴거야,지금 우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