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5. 21. 07:29
 페트라는 십자군 전쟁 시에 잠깐 유럽인들에게 알려졌다가 1812년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가 발견하기 전까지 700년이란 긴 잠을 자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잊혀진 도시를 『시리아와 성지 순례, Travels in Syria and the Holy land)』라는 책에 적었는데 이 책은 젊은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로버츠(David Roberts, 1796~1864)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 데이비드 로버츠 
로버츠는 어느 면으로 보면 현대판 입지전 즉 신화와 같은 인물이다. 영국 에딘버그(Edinburgh) 주변에서 태어난 로버츠는 어릴 때부터 그림에 천재적인 소질을 갖고 있었지만 집이 가난하여 학교에 갈 수는 없었다. 실제로 그가 경력을 위해 학교 졸업장이라는 자격증을 얻은 것은 40살이 되어서였다.

학교에는 입학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지만 그의 그림 그리는 재주는 단연 돋보여 7년 동안 <에딘버그트러스트아카데미>에서 보수 없이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당대에 소위 문맹자가 아카데미란 이름을 건 기관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은 파격적인 일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 후 그의 인생은 그야말로 동화와 같다. 20살 때인 1815년에 인테리어 장식가로서 첫 직장을 잡고 곧바로 에딘버그에 있는 ‘판테온’ 극장의 미술가로 발탁되더니 1819년 즉 24살에 에딘버그 왕립극장의 화가로 임명되었다.

당대의 틀에 잡힌 사회구조로 볼 때 학력이 전무하고 배경이 전혀 없는 그가 왕립극장의 정식 화가로 대접받았다는 것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림에 대한 실력이 누구보다 탁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로버츠에 대한 전문가들의 인지도인데 그의 학력과 배경이 미천함에도 불구하고 1831년 <영국화가협회>의 회장으로 당선되었고 1838년에는 영국의 왕립아카데미 회원이 될 정도였다.

그는 공적으로 승승장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화가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유럽의 수많은 국가를 여행하면서 건물, 전경, 기념물 등을 스케치, 드로잉은 물론 그의 특기라 볼 수 있는 수채화에 담았으며 동판에 자신의 그림을 에칭하기도 했다.

페트라 그림으로 세계적인 화가로 성장

그에게는 어릴 때부터 꿈꾸던 목표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동경하던 이집트, 팔레스타인, 시리아로의 여행이다. 당대에 외국으로의 여행이란 일부 특권층이나 할 수 있는 것이었므로 그는 자신의 꿈을 위해 평소에도 자산을 모으는 데 열중했다.

1838년 8월 예상한 만큼의 자금이 모이자 그는 자신이 원하는 원정대에 합류한다.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그가 여행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모든 여행 자금을 대었으므로 그의 원정대라고도 부를 수 있다.

▲ 궁정의 무덤, 데이비드 로버츠의 그림으로 페트라를 통해 유명작가가 되었고 그를 통해 페트라가 세계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파리를 떠나 말타와 사이클레이드를 방문한 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다. 사실 모든 자금을 여행에 투입하였고, 여행을 끝낸 후 발간할 책이야말로 유일한 수입원이었므로 그는 잠시도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다. 그는 피라미드 등을 보고 나일강을 따라 아부심벨을 방문했다.

그는 방문지마다 철저하게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드로잉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가 고난스러운 여행을 마다하지 않고 그림 그리는 데 열중했던 그의 명성이 이미 당대에 상당히 알려져 있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카이로에 묵었을 때 그는 모스크 즉 회교 사원의 내부를 그릴 수 있도록 허락받은 최초의 유럽인이었다.

여행을 계속하던 그는 어렸을 때 큰 충격을 주었던 페트라를 잊을 수 없었다. 드디어 1939년 그는 그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는 여행길에 들어섰다. 그는 시나이 반도는 물론 사해, 베들레헴, 레바논을 거쳐 그가 고대하던 요르단의 페트라를 방문했다.
 
이때 그린 페트라의 그림이야말로 그의 역작 중의 역작이다. 그는 페트라를 거쳐 팔미라를 방문하려 했으나 불행하게도 열병에 걸려 팔미라를 방문하지 못하고 영국으로 철수했다.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여행하는 동안 작성한 각종 자료들을 발간했다. 그가 갖고 온 자료를 본 출판사가 그에게 제시한 선인세가 무려 3천 파운드나 되었다는 것은 당대의 전설이 될 정도로 엄청난 평가를 받았음을 알려준다.

당대의 전설이 된 선인세

결론적으로 그는 자신이 직접 그린 수채화 그림을 6권으로 발간했는데 이것이 그를 영국 사상 가장 유명한 풍경화가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었고 재정적으로도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는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으로 전시회를 열어 판매하기도 했는데 그의 고객 중에는 유명 작가인 찰스 디킨스(Char;es Dickens), 윌리엄 새커리(William Thackeray), 윌리엄 터너(William Turner) 등의 저명인사가 있었고 그들은 로버트와 평생 친구가 되었다. 그 후 그는 계속하여 세계 각지로의 여행을 계속하였는데, 그림을 완성하자마자 현장에서 곧바로 판매되는 신화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도 세월은 막을 수 없는 법, 1864년 64세로 눈을 감았고 노르우드(Norwood)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드로잉, 스케치, 수채화이지만 유화도 적지 않은데 대부분은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유명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사실상 페트라가 과거의 영광을 되찾은 것은 로버츠의 영향이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을 정도로 그의 페트라 그림은 압권이다.

페트라는 그 중심부에서부터 물이 말라버린 강(와디)들과 고대 대상로들을 따라 사방으로 수 킬로미터까지 뻗어 있는데 얼마 전에도 동굴에 거주하는 베둘족(베두인족 가운데 페트라에 사는 이들을 뜻함)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나바테아인들이 만든 물 저장 장치에 고인 물을 마시고 염소를 돌보며 지냈다.

페트라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자 요르단 정부는 인근 지역에 콘크리트 블록 집을 건설한 후 이들의 이주를 종용했다. 학교와 진료소를 건설해주자 결국 1천여 명에 달하는 이들이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들이 승낙한 이유는 극히 현실적인 그들의 요구조건을 요르단 정부가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옮기는 새로운 거주지에서 염소를 방목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콘크리트 블록 집보다는 자신들이 과거부터 살아오던 습속을 바꿀 수 없다는 설명이다. 물론 정부에서는 페트라 발굴단의 연구원으로 특채될 수 있도록 우대하고 막일할 때에도 우선권을 보장하며 행상도 반대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부가했다.

▲ 페트라의 베두인, 베두인들은 아직도 고대 유목민의 생활을 주장한다. 

페트라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사전에 정보 없이 다니다가는 길을 잃기 쉽다고 한다. 누군가가 실종되면 정부는 이 지역을 지키는 군인들에게 의뢰하는 것이 아니라 베둘족에게 수색을 의뢰한다.

그들은 페트라 지역을 잘 알고 있으므로 길을 잃어 탈수 증세라도 보이는 사람들을 발견하면 나름대로 치료한 후 낙타나 소형 트럭에 태워 데려온다고 한다. 안내인이 없이 페트라의 구석구석을 살펴보려면 반드시 낙오될 때 필요한 물을 챙기라고 조언하는 이유이다.

부르크하르트에 의해 재발견된 이후 페트라는 계속 발굴되었는데 1896년 <예루살렘성서고고학연구소>에서 최초의 보고서를 출간했다. 그 후 1897-1898년에 걸쳐 독일의 부른노우와 도마츠브스키에 의해 무덤과 건물들이 발굴되었으며, 계속하여 로마시대의 도시가 발굴되기도 하였다.

1929년 콘웨이와 호스필드에 의해 페트라의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졌고, 그 후 1982년에 이르기까지 로마 극장과 여러 유적들이 추가로 발굴되었지만 학자들은 도시 중심부의 75퍼센트 이상이 아직도 드러나지 않았다고 추정한다. 현재 미확인된 지역에 대한 발굴이 진행되고 있으므로 이 유적들의 모습이 나타나면 지금까지 알려진 페트라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줄 것으로 생각한다.

베두인의 고향

페트라가 있는 요르단은 전형적인 농업국이지만 사람이 살기에 부적합한 척박한 땅이 거의 75퍼센트나 된다. 국토의 면적은 남한보다 약 10퍼센트 정도 작은 8만9천 제곱킬로미터이고 인구는 2008년 기준 약 620만 명이다.

요르단은 크게 요르단 강, 팔레스타인 구릉 지대, 트란스 요르단 고원, 사막 평원으로 나누는데 팔레스타인 구릉 지대는 1967년 중동 전쟁 때 이스라엘에게 많은 지역을 빼앗긴 데다 팔레스타인의 활동 무대이므로 이스라엘과 항상 긴장 상태에 있다.

현재 요르단을 구성하는 인종은 팔레스타인과 베두인인 아랍인이 절대 다수이다. 이 중 베두인은 황량한 대지에 천막을 치고 이리저리 흩어져 유목 생활을 하면서 무력 사용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 것으로도 유명하다.

베두인은 낙타ㆍ양ㆍ염소 같은 가축을 키우며 먹이인 풀을 찾으면서 여러 지역을 돌아다닌다. 이들은 주로 물이 있는 오아시스나 말라 버린 강 주변에 천막을 치고 산다. 항상 이동해야 하므로 간이로 지은 집에 사는 것이 보통이지만 최근에는 정착하는 베두인 족들도 많아지고 있다.

베두인의 생활 중에서 흥미로운 것은 낙타나 염소의 털로 짠 천으로 만든 천막이다. 기둥과 지붕을 ‘단부’라 불리는 밧줄로 연결하는데 사막에서 길을 잃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이 단부를 잡는다. 그러면 집주인이 물이나 음식을 주면서 여러 가지 정보를 알려준다고 한다.

▲ 모세의 죽음, 학자들은 성서에 기술된 이집트 탈출 및 가나안 정복 등이 대체로 역사적 사실에 부합되므로 모세가 실존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베두인의 의상은 매우 독특하다. 현대화된 문명의 영향으로 최근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전통적인 복장을 고수하면서 살아간다. 남자들은 주로 목 부위에 단추가 달린 흰색으로 만든 기다란 ‘소브’라고 불리는 헐렁한 가운을 입고 다닌다. 그리고 모자를 쓰고 그 위에 널찍한 장방형의 무명천인 ‘구트라’를 쓴다.

여자들은 흰색 블라우스에 발끝까지 내려오는 다채로운 색깔의 드레스를 주로 입는다. 머리에는 검은 수건을 두르고 눈 주변에는 검은 화장을 한다. 거리를 다닐 때는 항상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데 이는 코란에 ‘여성은 음부나 가슴은 덮어 가리고 어버이, 형제, 남편, 아들, 노예 이외의 남성에게는 신체를 보여서는 안 된다’라는 가르침을 따르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베두인 여성들은 앞이마를 장식한 보석을 비롯하여 코걸이, 손가락과 발가락 반지, 코란 글귀가 새겨진 목걸이 등 보통 2~4개씩은 하고 다닌다.

요르단의 특징은 중동 국가이면서도 석유가 생산되지 않는 자원 빈국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근래 석유가 없는 대신 ‘죽음의 바다’로 알려진 사해(死海)에서 유용한 광물 자원이 대량으로 생산되어 화학 및 비료 산업이 발달했다. 이 부분은 뒤에서 다시 설명한다.

모세의 활동 무대

요르단은 성경의 주 무대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은 남쪽에서 지중해 연안까지의 여러 대상로를 장악했는데 그 중에는 모세와 관련되는 장소가 많이 있다.

모세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아니더라도 관심을 보이는 것은 그의 생애가 극적인 것은 물론 서양으로 구분되는 세계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모세는 『구약성서』의 다섯 책인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모두 모세와 관련되어 있는데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출애굽기》, 《민수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특히 최근의 고고학적 ·금석문학적(金石文學的) 연구 결과, 성서에 기술된 이집트 탈출 및 가나안 정복 등은 대체로 역사적 사실에 부합된다고 인정되어 모세가 실존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일반적으로 모세는 이집트가 자랑하는 제국시대인 제19왕조의 람세스 2세(재위 BC 1290∼BC 1223)로부터 박해를 받았으며 이스라엘인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일으키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시나이산(山)에서 신으로부터 십계명(十誡命)을 받는다.

▲ 여리고의 원경, 여리고의 유적지(산 정상 중앙)는 기원전 9000년경으로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도시로 추정한다. 

모세가 람세스 2세 시대의 사람이라면(이보다 약 100여 년 앞선 투모세스 3세 시대로 추정하기도 함) 모세의 이야기는 기원전 13세기에서 기원전 15세기로 추정하며 성경에 나타나는 여리고는 이 당시로 볼 수 있다.

그 후 모세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에돔·모압의 광야에서 40년에 걸친 유랑생활을 계속하다가 결국 자신은 가나안에 도달하지는 못하고 요단강을 건너기 전 여리고(Jericho) 맞은 편에 있는 모압 땅의 느보산(山)에서 120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의 유지는 이어져 후계자인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인을 이끌고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강력한 국가들과 전쟁을 치루는데 그 중 첫 번째 도시가 여리고이다. 성경에는 이스라엘인들이 나팔을 불고 함성을 지르자 여리고의 성벽이 무너졌다고 한다.

여리고는 현존하는 세계 도시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그 연대가 모세 시대가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는 신석기 심지어는 구석기 시대로 인식하는 기원전 9000년~기원전 7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엄밀한 의미에서 여리고는 현재 요르단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점령한 분쟁지역인 웨스트 뱅크(West Bank)에 있는 도시이다. 그러나 과거 성경의 무대를 현 국가 개념으로 단정하여 구분할 수 없으므로 이 장에서 설명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방어용 구조물

약 1만 5천년 전을 전후해 지구상의 기후가 온난해지면서 빙하가 녹기 시작하고 황량했던 지역에 초목이 자라고 야생 생물들이 살기 시작하면서 인간들은 새로운 생활방식들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수렵과 채집에서 농업으로 생활방식의 기반이 바뀐 것이다.

농업은 수렵에 비해 노동집약적이지만 일정한 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수단으로 적격이다. 인구가 증가하자 사람들은 촌락과 작은 도시들을 세우고 성을 쌓아 외부의 침입을 막고자 했다. 농업 생활로 식량의 저축이 가능해지자 이를 빼앗으려는 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한 것이다.

이러한 농업생활인들이 만든 방어용 구조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곳이 바로 여리고이다. 여리고인들은 기원전 9000년~기원전 7000년경 돌과 진흙벽돌로 성과 탑들을 건설했다. 그들은 또한 흙을 반죽하여 죽은 사람의 유골에 바른 후 자주색 조개껍데기로 눈을 만들어 붙였으며 머리카락과 수염은 적갈색으로 색칠을 했다.

여리고의 인구는 2천명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는 신석기시대 한 마을의 인구를 100~150명 정도로 추정할 때 거의 20배 이상의 인구가 한 지역에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연히 이들 공동사회를 통치할 수 있는 지배자가 등장하는데 이는 고대 전제사회로 들어가는 기본 여건이 조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계속)

참고문헌 :
 『세상을 바꾼 건축』, 클라우스 라이홀트 외, 예담, 2006
「요르단 사막 속에 꽃피운 중세 유적을 간직한 나라」, 허요한, 뉴턴, 1997년 11월
「여리고(Jericho)성의 상징적 특성에 관한 연구」, 남호현, 건축역사연구 제11권 4호 통권32호, 2002년 12월
『세계사의 100대 사건』, 리더스다이제스트, 1995
이종호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초빙과학자 | mystery123@korea.com

저작권자 2009.04.08 ⓒ ScienceTimes
Posted by @topcpla PeachPri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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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heap oakley sunglasses 2013.07.19 03: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신 매력있어, 자기가 얼마나 매력있는지 모르는게 당신매력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