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5. 14. 00:35

▲ 페트라의 시크, 페트라로 진입하는 유일한 통로로 약 1킬로미터나 미로처럼 이어진다. 
과학으로 보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사해와 아카바 만 중간에 위치한 페트라는 구석기시대부터 신석기시대 이후까지의 유적이 발굴될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이 가운데 특히 구약성서에서 에돔의 셀라(Sela)로 언급되는 시기를 학자들은 기원전 1400~1200년으로 추정한다.

이 지역은 또한 '바위에 거하는 자들'이라는 뜻을 지닌 '호리 족속'의 거주지였는데, <사사기> 1장에서는 "아모리 사람이 살던 지역은 아그랍빔 비탈부터 셀라를 거쳐 그 위쪽이었다"라고 적혀 있는 등 '아그랍빔 비탈의 바위'로 언급된다.

'바위'라 불리는 이 도시의 이름은 시실리의 디오도루스에 의해 최초로 언급되는데, 그는 나바테아인들이 기원전 312년 안티고누스 1세의 공격을 받고 그들의 생명과 음식과 가재들을 이 도시에 숨겨놓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곳을 구약의 셀라와 같은 장소로 본 사람은 교회사가 유세비우스였으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스라엘이 미디안의 다섯 왕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던 역사에서 이때 처형당한 미디안의 왕 레켐을 페트라의 왕으로 보았다.

페트라를 만든 수로

아라비아에서 이주해 온 유목 민족인 나바테아인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6세기의 일로 이들은 기원전 580년경 에돔족과 혼합되었으며 페트라는 기원전 400년경부터 종교적 중심지이자 수도로 자리 잡는다.

페트라가 동시대에 특별하게 중요시되었던 것은 유럽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을 연결하는 지역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수천 년에 걸쳐 계절적 급류인 와디 무사(Wadi Musa)에 의해 형성된 좁은 협곡을 의미하는 시크(Siq)는 도시로 진입하는 유일한 통로로 밖에서는 그 입구마저 잘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입구부터 높이 100미터에 이르는 구불구불한 사암 절벽이 1킬로미터나 미로처럼 이어져 있다. 그러면서도 식수가 많이 나와 도시를 지킬 만한 사람들이 살기에 충분했다.

대상들이 페트라를 통해 이집트의 기자, 지중해, 시리아는 물론 동쪽으로 여행할 수 있으므로 페트라는 통행요금 징수와 아스팔트의 무역을 통한 수입이 많아 도시 사람들은 아주 부유해졌으며 그들이 관장하는 지역은 현재의 시나이 반도에서 아라비아 반도 절반 정도에 달하는 50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했다.

▲ 페트라의 조각상과 수로, 페트라에서 가장 유명한 시크 안의 대상들을 조각한 것으로 하단 후면에 수로가 있다. 

페트라 자체는 작은 협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상주 인구의 규모에 한도가 있었으나 전성기 때에는 페트라와 연계되는 주변 지역에 무려 50여 만 명이 거주할 수 있었다. 페트라가 번성하게 된 열쇠는 나바테아인들이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페트라는 원래 연간 강우량이 고작 105밀리미터에 불과하지만 그들은 빗물을 마치 귀중한 곡물처럼 각지에서 거둬들여 저장할 수 있도록 테라코타로 만든 정교한 저수시설을 설치했다 일부 장소는 조각품처럼 잘 깎아 만들어 방문자들을 감탄하게 만드는데 시크의 중앙 부분에 있는 수로 옆의 대상(隊商)들의 조각은 페트라 최고의 걸작품으로 꼽힌다.

그들은 바위에 물이 고이도록 수백 군데를 오목하게 깎아 놓아 가뭄을 이겨낼 수 있었고 도시를 에워싸고 있는 산들에 석조 댐을 건설해 폭우 뒤에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는 물의 범람을 방지할 수 있었다.

요르단박물관의 아마르 박사는 페트라 안에만 200여 개의 저수시설이 있는데 이곳의 저장량은 약 4천160만 리터에 달하여 10만 명이 1년 동안 사용해도 충분한 양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식수만으로는 인근에 상주하는 50여 만 명의 식수를 공급할 수 없는데 그들도 주변에서 거대한 식수원을 사용했다.

가장 부유한 도시로 번창

낙타를 몰며 대상들에게 길을 안내하던 나바테아인들은 전설적인 유향로(乳香路)의 북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상들에게 사막에서 생존할 수 있는 비법을 전수해주었다.
 
그 비법은 다소 엉뚱하게 들리겠지만 페트라에만 도착하면 사막의 모래바람을 피할 수 있고 물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는데 사막을 건너다녀야 하는 대상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정보였다. 물론 그들의 제안은 공짜가 아니었다. 그들은 대상들로부터 통행료를 받았는데 이것이 페트라가 동시대에 가장 부유한 도시로 번창한 이유이다.

▲ 파라오의 보물, 헬레니즘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의 건축 전통을 따르고 있으며 파라오의 보물이 있다고 알려졌지만 나바티아 왕 하리스 4세의 무덤이었음이 밝혀졌다. 
해발 950m의 은닉처인 페트라는 높고 가파른 암벽들이 좁아지면서 도시 외곽에 어두운 골짜기를 형성하여 접근이 어렵고 적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하여 로마도 무력으로는 페트라를 정복할 수 없었다.

그러나 로마는 전투에 관한 한 고수 중의 고수였다. 2세기 초, 로마군은 여러 차례의 공격에도 함락되지 않자 페트라로 흘러드는 물줄기를 끊었다. 혹독한 식수난을 겪게 되자 결국 나바테아인들이 로마에 항복했다는 것이다.

페트라는 기원후 106년 트라야누스 황제 때 로마의 확장 정책의 일환으로 로마에 합병되었는데 학자들은 로마인들이 페트라를 정복한 것이 아니라 정략적인 면에서 페트라가 합병하는 데 동의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실제로 페트라를 방문하면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수로를 볼 수 있는데 이들 수로는 천혜의 빗물을 모두 받아 저장하기 위한 작품으로 페트라가 식수 때문에 로마에 항복했다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여하튼 로마에 정복된 페트라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방문한 이후 ‘하드리아누스의 페트라’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여하튼 페트라는 로마에 합병된 이후에도 페트라를 번영케 했던 무역로의 기능은 계속되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페트라의 통치세력이 나바테아인들로부터 로마인으로 교체된 것뿐이었다.

골짜기가 워낙 좁아 페트라에는 대규모의 독립적인 건물을 건설할 수 없었다. 그래서 주민들은 그들의 신과 망자들과 함께 바위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페트라의 암석은 파내거나 조각하기 수월한 사암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페트라에서는 바위를 깎아 무덤과 주거지를 만들었는데 현재 800개의 주거지와 무덤이 발견되었다. 도시 길이는 8킬로미터에 달하며 시가지 입구는 동쪽의 시크, 남쪽의 투그라, 북쪽의 투르크 마니에라라는 3개의 협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페트라는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 2세기 사이에 전성기를 누렸는데 당시 페트라의 인구는 3만 명을 넘었다. 페트라에는 포장도로, 목욕탕, 상점. 극장(2개), 장터(3곳), 궁전, 체육관, 계단식 정원 등이 있었다.

파라오의 보물과 로마 유적

현대인들을 감탄케 하는 유적은 장밋빛 사암을 새겨 만든 신전과 무덤의 정면부인 카즈네피라움(Khazneh Fir'awn, 파라오의 보물)으로 시크를 통과하자마자 나타난다. 이 건물 앞에는 넓은 광장이 펼쳐져 있는데 페트라인들은 붉은 사암에 높이 40미터, 너비 28미터의 정면부를 예술적으로 아주 화려하게 새겨 놓았다.

▲ 로마인의 극장 유적, 바위산을 반쯤 깎아 움푹하게 만든 건축물로 너비 40미터, 33개 계단에 약 6000명의 인원을 수용할 만큼 그 규모가 크다. 

정면부는 2개의 박공벽, 프리즈, 기둥, 조각상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면부 중앙에 대좌가 있고 그 위에 항아리가 있는데 베두인들은 그 안에 파라오의 보물이 있다고 생각했다.

정면부는 예술적으로 아주 화려하게 새겨 놓았지만 내부는 너무나 소박하고 간소하다. 이 건물은 헬레니즘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의 건축 전통을 따르고 있는데 이것은 17세기에 중세유럽에서 유행했던 바로크 양식과 유사하다.

건축 방법은 정면에서 굴을 파고 들어간 것이 아니라 천장에서 구멍을 뚫고 수직으로 깎아내렸는데 그 공간이 무려 1천700세제곱미터나 된다. 그러므로 이 건물은 건축된 것이 아니라 조각된 것이다.

원래 건물 자체가 파라오의 보물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으므로 페트라 안의 기둥에 있는 커다란 화병 조각 속에 보물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보물들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 건물은 근래의 발굴 조사에 의해 나바티아 왕 하리스 4세의 무덤이었음이 밝혀졌다.

카즈네피라움에서 협곡을 따라가면 열주대로의 서쪽 끝에 있는 신전 카스르알빈트피라움(Qasr al Binr Fir'awn, 파라오 딸의 성(城)이라는 뜻)이 있다. 바위를 깎지 않고 만든 유일한 건물로 이 도시의 주신(主神)인 두샤라를 모셨던 곳이다.

본전은 높이 23미터로 열주랑·전실(前室)·지성소로 이루어져 있고 신전 앞뜰에는 야외 제단이 설치되어 있다. 두샤라 신은 처음에는 돌기둥 모양을 했다가 나중에는 인물 모양의 숭배상으로 기려졌다.

신전의 이름으로 미루어 이 지역이 오래 전부터 문화적으로 이집트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지만 이와 같은 변화는 나바테아의 통치자가 족장의 신분에서 왕이라는 전제군주로 바뀐 정치적 변화 때문이다. 두샤라는 그리스의 디오니소스와 동일시되었으며 흉벽 무덤이나 계단 무덤의 자리에 그리스 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은 왕들의 무덤이나 무덤 신전들이 도입되었다.

학자들은 이들 무덤 건물들이 회로 칠해진 후 그 위에 그림들이 그려졌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바람과 모래 등 자연 침해에 의해 회벽이 사라지고 바위만 남아 당초의 설계자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환경으로 변모되었다는 설명이다.

▲ 아시리아 건축 예술로 건설된 유골함이 있는 무덤 전경. 

카스르알빈트피라 우측에는 2세기 초에 나바테아인들이 건설한 것을 이곳을 지배한 로마인들이 확충한 너비 40미터, 33개 계단으로 된 극장 유적이 남아 있다. 바위산을 반쯤 깎아 움푹하게 만든 건축물로 강렬한 인상을 주는데 약 6천명의 인원을 수용할 만큼 그 규모가 크다.

학자들은 이 극장을 각종 예술 행사나 오락적 행사를 위한 기능보다는 하나의 제의적 기능을 갖춘 장소로 인식하며 왕의 장례식은 물론 각종 회의 및 종교 의식을 치룬 것으로 추정한다. 극장 왼쪽에는 로마시대의 시가지가 있는데, 이곳에는 열주대로가 뻗어 있고 왕궁·신전·공공욕장 등의 유적이 있다.

사막의 경계 지역에 건설된 도시

도시의 서쪽 끝에 바위를 깎아 만든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장례사원인 앗데이르(ad-Dayr, 수도원) 유적이 있다. 카즈네피라움과 마찬가지로 암벽을 깎아서 만든 2층 건축물로 높이 50미터 길이 45미터이다. 1세기 말 오보다스(Obodas) 왕에게 바쳐진 신전 또는 무덤으로 추정하며 4세기부터 비잔틴 교회로 사용되었다.

이 계단 길은 좌우에 무덤과 제물을 봉헌하는 벽감들이 줄을 이어 있으므로 일종의 ‘성스러운 길’로 통한다. 그러나 ‘유골함이 있는 무덤(Tomb of the Um)'을 비롯해 페트라의 많은 무덤이나 장례 후 연회가 펼쳐졌던 석조 트리클리니움(triclinium, 의자가 3면에 달린 식탁이 있는 식당)의 계단 장식은 아시리아 건축 예술이다. 산의 정상에서는 이스라엘 지역까지 보이며 사해(四海)도 보인다.

영국의 고고학자 레오너드 울리(Leonard Wooley) 경은 이를 보고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바테아의 건축가들은 고전적인 건축물을 세밀히 분해하여 여러 조각을 낸 다음 처음 설계도의 기능과는 전혀 상관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결합시켰다."

영국의 레이야드 경(A. H. Layard)은 1887년 이곳을 방문하고 보다 감탄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물 등 사람의 생존에 필요한 것이 없는 사막의 경계 지역에서 바위에 극장, 신전, 공공기관, 무덤, 개인용 건물 등을 끈질긴 노동으로 건설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다.”

▲ 페트라의 키스 바위 
106년 로마에 정복 당한 후 페트라도 기독교를 받아들여 주교의 근거지가 된 동시에 한동안 계속하여 번창했지만 쇠락의 길을 피하지는 못했다. 로마가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리된 후 이 지역을 통치한 것은 동로마였는데 동로마는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페트라보다는 팔미라를 무역의 중심지로 변경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트라 지역은 계속 유목민들의 휴식처로 사용되었는데 363년과 551년에 강력한 지진이 이곳 지역에서 일어나 거주환경이 나빠지자 주민들이 페트라를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이러한 사실은 1993년에 발견된 6세기경의 파피루스 뭉치 150여 개에서도 증빙된다. 이 파피루스에는 데오도쿠스 가문의 7대에 걸친 기록이 들어 있는데 582년까지의 혼례 기록이 남아 있다.

학자들은 이들이 갑자기 페트라를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이주한 이유는 지진 등으로 거대한 저수시설이 파괴된 것을 보수하지 않아 모래에 파묻히자 더 이상 살 수 있는 거주 여건이 되지 못했다고 판단한다. 즉 그동안 페트라를 지탱하던 물이 말라버리자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설명이다.

여하튼 이 파피루스 속에는 6세기경 페트라 상류층들의 일상생활이 자세히 적혀 있으므로 파피루스의 내용이 해득되면 페트라의 많은 부분이 알려질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 이 파피루스는 요르단 수도 암만의 <아코르동양연구소>에 보관되어 있다. (계속)

참고문헌 :
  http://jesusloveus.org
『유네스코 세계고대문명』, 생각의나무, 2006
「페트라, 바위를 깎아 만든 고대 도시」, 돈 벨트, 내셔널지오그래픽, 1001년 10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베텔스만, 2003
「2000년된 고도 페트라 유적지」, 나비뉴스, 2007.5.17
『지중해』, 김성호 외, (주)에오스여행사출판부, 2007

이종호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초빙과학자 | mystery123@korea.com

저작권자 2009.04.06 ⓒ ScienceTimes
Posted by @topcpla PeachPri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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